따스한 추억

by Rainsonata

2010년 8월 23일


매일 아침 할머니를 만나는 새벽 5시.


처음에는 잠에 취해 몽롱했던 정신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안개가 걷히듯 시야가 맑아짐을 느낄 수 있다. 밭았던 호흡이 서서히 깊어지고, 나른했던 몸에서도 생기가 솟는다.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악명 높은 잠꾸러기로써는 꿈도 꿔볼 수 없었던 일이 현실이 된 요즘. 나는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새벽 5시에 시작하는 백일기도는 온 정성을 다해 할머니를 기리는 애도 의식이다. 그리고 나 자신과의 약속이며 하나의 다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나는 더 이상 잠꾸러기라는 핑계를 댈 수 없다. 내가 사람이라면, 적어도 할머니를 보내드리는 길에 이 정도의 예우는 갖춰드리고 싶다.


병마가 깊어지면서 할머니의 수면시간이 불규칙해지자, 시계 같던 할머니의 일상의 태엽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평소에 게으름이라고는 찾아볼 수 조차 없었던 할머니의 대쪽 같은 성품이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허물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많이 가슴 아팠더랬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의 할머니는 늘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정갈한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하셨던 분이다. 지금도 그때의 일상이 또렷이 기억난다. 할머니의 온화한 미소, 내 손을 잡고 꽃이 핀 화단으로 사뿐사뿐 걸어가시던 모습, 우리 둘이 나란히 다리를 뻗고 앉아 '단추 단추 새 단추'를 하던 시간, 조용히 담장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즐기던 아름다운 추억.


집은 따뜻하고, 아늑하며 때로는 시원하고, 맘껏 쉴 수 있으며, 좋아하는 음식만 먹어도 괜찮고, 아무 데나 마구 드러누울 수 있고, 수다가 흉이 되지 않으며, 엉뚱한 행동을 해도 웃어주는 가족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신 분도 할머니시다.


늦게까지 친구들과 놀면서 어른 흉내를 내고 싶던 시절에는 야속하기만 했던 밤 8시 통금시간도,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의 사랑과 관심의 증표였던 것이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내가 택시를 타고 외출을 하면 동네 앞 도로까지 나오셔서 택시 번호를 적어가시던 우리 할머니. 그때는 할머니의 과잉보호가 짐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안다. 그건 우리 할머니가 내 가슴에 달아주신 자랑스러운 훈장과도 같다는 것을.


나를 향한 마음이 각별하셨던 할머니. 연세가 드시고 매일 치르는 약과의 전쟁으로 괴로워하시면서도, 손녀딸을 걱정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으셨던 할머니. 우리 곁을 떠나시기 사흘 전, 저녁에 외출한 내가 걱정되신다며 할머니께서는 귀가를 재촉하는 전화를 무려 세 통이나 하셨다. 이제는 결혼도 하고, 한 아이의 엄마이고, 나이도 서른일곱이나 먹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웃으면서 장난치듯 말씀드렸는데, 그 전화가 할머니께서 직접 걸어주신 마지막 전화가 되었다.


오늘 밤, 꿈속에서라도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시원한 아침 공기를 함께 마실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