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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Feb 19. 2024

바벨 (2007)

- 우리로 불통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감독 :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출연 : 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란쳇,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야쿠쇼 코지, 아드리아나 바라자, 키쿠치 린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2007년 작품 <바벨>을 보았다.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 <레버넌트>를 좋아해서 다른 작품들도 보려고 다운로드하여놨다가, 지난 설연휴 동안에 먼저 <바벨>을 보았다. 영화도 영화이지만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 Bibo no Aozora를 듣다가 이 영화에 어떻게 삽입되었는지 궁금해서 보게 된 이유도 있다. 


<버드맨>이나 <레버넌트>의 완성도를 기대하면 좀 실망하게 될 테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잘 봤다. 하나의 사건이 지역을 달리해서 연쇄적으로 반응하며 소위 '나비효과'에 대한 이야기로 심플하게 정리할 수도 있지만 제목이 'BABEL'이라는 것은 '소통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말일 것이므로 영화에서 '불통'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의 관점으로 리뷰를 쓰려고 한다. 


모로코, 미국, 일본 멕시코. 영화는 네 나라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하나로 엮는다. 왜냐하면 이들이 겪는 일은 하나의 사건에서 시작된 일이기 때문이다. 

리차드(브래드피트)수잔(케이트 블란쳇) 부부는 모로코로 둘만의 여행을 왔는데, 어쩐지 아내 수잔은 이 여행을 전혀 즐거워하지 않는 듯 보인다. 심지어 왜 여길 왔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남편 리차드는 아내의 기분을 어떻게든 풀어주려고 노력한다. 이들을 포함한 관광객을 태운 버스는 모로코의 시골길을 위태롭게 달리고 있었고, 그때 창문에 멍하니 기대어 밖을 보던 수잔의 목에 총알이 박힌다. 현지인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수잔, 도대체 누가 총을 쏘았단 말인가. 


모로코의 유세프와 아흐메드 형제(어린 소년들이다)에게 아버지는 총을 한 자루씩 쥐어주고 집을 비운다. 아들들에게 총을 준 이유는 가축을 지키라는 것, 맹수로부터 가축을 지키기 위해서는 총이 필요하고, 그 총을 아버지는 건너 마을에 사는 핫산에게서 샀고, 아이들에게 총을 쏘는 법을 알려주고 집을 비우는데..

아이들은 그렇게 무거운 책임을 안고 방치되어 누가 더 총을 잘 쏘느냐, 명중률이 높으냐로 내기를 하다가 관광버스를 향해 총을 쏘았고, 동생 아흐메드가 쏜 총에 수잔이 맞은 것이다. 


갑작스레 사고를 당한 아내 때문에 예정된 시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리차드는 두 아이들의 유모 아멜리아(아드리아나 바라자)에게 조금만 더 돌봐달라고, 동생에게 부탁했으니 곧 갈 거라고 집에 전화를 걸고. 병원은 먼 곳에 있고, 이 일을 테러로 본 미국과 모로코 사이에 갈등이 생겨 아내 수잔을 병원으로 이송할 헬기가 뜨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리차드는 미칠 지경인데..

그런데 유모 아멜리아는 멕시코 사람으로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멕시코에 사는 아들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는데, 오겠다던 리차드의 동생은 오지를 않고, 리차드도 당신밖에 없으니 미안하지만 아이들을 잘 지켜달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고, 여기저기 아이들을 맡긴 곳을 찾지만 찾을 수 없어, 결국 아이 둘을 데리고 멕시코로 떠난다. 



한편 일본에 사는 여고생 치에코(키쿠치 린코)는 청각장애인으로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렵다. 신경질적이고 들이받는 성격 탓에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고, 아빠 야스지로(야쿠쇼 코지)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이 힘들다. 부녀간의 대화를 통해 엄마가 부재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곧 엄마가 자살했다는 것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런 아픔을 겪었다는 것을 모르는 친구들을 아직 처녀딱지를 못 떼었기 때문이라며 치에코의 속을 긁고 자신과 비슷한 청각 장애인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우연히 만한 남학생들이 관심을 보이다가 자신이 청각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자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관심을 철회하는 이런 상황이 너무 싫은 치에코는 속옷을 벗고 의자에 앉아 치마를 걷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기행을 저지른다. 

아빠에게 반항적이어도 아빠가 꼭 가라고 했기 때문에 치과에 간 치에코. 갑자기 치과 의사 선생님(남자)의 손을 잡아 자신의 성기에 가져가는 이상 행동을 보여 병원에서 쫓겨나 집에 온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 로비에는 두 명의 형사가 자기 아빠를 찾고 있었는데, 엄마의 자살 사건 때문에 찾아왔다고 생각한 치에코는 아빠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말로 그들을 돌려보낸다. 



아들 아흐메드가 총을 쏜 줄은 꿈에도 모르고 돌아온 아버지는 미국인이 총에 맞아 죽었다며 지금 경찰이 범인을 찾고 있다고 말하고, 유세프와 아흐메드의 속은 타들어간다. 아흐메드의 집까지 찾아온 경찰은 사용된 총을 확인한 후 '핫산'에게 그 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후 그에게 가 다짜고짜 폭력을 휘두르는데..

한편 아멜리아는 멕시코에서 자신을 데리러 온 조카 산티아고(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차에 리차드의 두 아이들을 태워 함께 멕시코로 떠나고, 낯설어하던 아이들도 결혼식 파티 분위기에 함께 즐거워하는데.. 


수잔은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가이드가 데려온 의사라는 사람은 수의사였고, 아무런 마취제도 없이 상처를 꿰매는 극한 고통 속에서 '집에 가고 싶다고, 아이들이 보고 싶다고' 힘 없이 말한다. 

한껏 술에 취한 산티아고는 미국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멜리아와 아이들을 자신의 차에 태우는데..

이미 여러 번 음주운전의 전적이 있었던 산티아고, 국경을 넘으려는데 깐깐한 수비대 앞에서 어쩌지를 못하고. 아멜리아도 아이들의 여권은 챙겨 왔지만 부모 동의서 없이 온 것이 문제가 되어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잡히면 안 되는 산티아고는 이들을 태운 채 마구잡이로 달리기 시작하고..



친구와 놀고 집에 돌아온 치에코는 늦는다는 아빠의 쪽지를 보고 갑자기 낮에 찾아왔던 형사 한 명에게 연락을 해 집에 오라고 하고, 엄마가 죽었던 날 이야기를 꺼내다가 그 일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형사가 돌아가려고 하자 잠깐 기다리라며 옷을 다 벗고 그 앞에 선다. 형사는 당황했지만 이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공허한 것이기에 이러한 것인가 연민을 느끼며 치에코를 안아주고, 돌아가던 길 귀가하는 야스지로를 만나 모로코에 사는 핫산이라는 사람에게 '총을 주었느냐'라고 묻는다. 


치에코로부터는 엄마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들었는데 야스지로는 핫산에게 준 그 총, 바로 그 총으로 아내가 자살을 한 것이라고, 이미 여러 번 자신도 치에코도 경찰서에서 진술한 내용이라고 말하고, 집에 들어와 딸아이를 찾는데, 아이가 발가벗은 채 발코니에 기대에 있는 모습을 보고, 아빠 야스지로가 놀라지만 말없이 다가가 아이를 꼭 안아주자 치에코도 아빠를 마주 안은 손에 힘을 주고 기댄다. 



억지로 상처를 꿰맨 덕에 출혈을 잡고 힘들게 대화를 이어가는 리처드와 수잔 부부. 수잔은 아이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힘겹게 말한다. 속내를 털어놓는 아내의 말에 귀 기울이며 위로하는 리차드. 그렇게 부부가 마음을 전하며 눈물을 흘릴 때 헬기가 떠 수잔은 병원으로 이송되고, 잘 해결되려는 걸까 싶었던 리차드는 의사로부터 근육 안 쪽에 혈액이 응고되어 괴사가 있을 수 있어 팔을 절단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은 척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들과 통화하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 리차드의 아이 둘과 미국과 멕시코의 경계 어딘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버려진 아멜리아. 피곤에 모두 잠이 들고 새 날이 밝지만 여기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아멜리아는 어린 리차드의 딸을 업고 한참을 걷다가 도움을 청하고 오겠다며 아이들만 두고 정처 없이 헤매고. 가까스로 경찰차를 발견해 상황을 설명하지만 경찰은 도주 경력이 있는 아멜리아의 말을 의심하고 수갑을 채운다. 하지만 아이들이 같이 있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기에 함께 아이들을 찾아 나서지만 두고 떠났던 곳에선 이미 아이들이 사라진 상태이다.


TV 뉴스를 통해 퇴원하는 수잔의 모습이 나오고, 깁스를 하긴 했지만 담담한 표정으로 리차드와 함께 걸어 나오는 수잔을 보니 다행히 양쪽 팔이 다 있다. 경찰서에서 취조받는 중인 아멜리아, 16년을 미국에서 문제없이 잘 살았건만,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부모 동의 없이 아이들을 멕시코로 데려갔다가 하마터면 큰 일 날뻔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영구 추방이 된다. (아이들은 무사히 구조되었다고 경찰의 입을 통해 정보를 전한다) 

아흐메드가 촌 쏭에 미국인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형제의 아버지가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다가 이들을 잡으러 온 경찰과 대치하게 되고, 경찰은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고 총을 쏘아댄다. 공포에 사로잡힌 형 유세프는 도망치고, 다짜고짜 총을 쏴대는 경찰에게 화가 난 아흐메드 역시 경찰에게 총을 쏜다. 아버지는 아흐메드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유세프에게는 움직이지 말라고 절규하지만 어느 하나 말을 듣지 않고, 결국 경찰이 쏜 총에 유세프가 맞고 쓰러지자 아흐메드는 총을 내려놓고 자신이 한 짓이라고 손을 든다. 




야스지로가 핫산에게 준 총은 다시 아흐메드와 유세프 형제의  손에 들어가고,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에 미국인 관광객은 중상을 입고, 예정에 없었던 사고로 인해 제 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부부로 인해 아멜리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멕시코에 가게 되고 무사히 돌아오는 것에 실패해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아이의 갑작스러운 죽음, 엄마의 자살은 나에게, 우리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익숙했던 일상을 망가뜨린다. 너와 나, 우리 모두 상처를 받았지만 원래의 우리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어느 정도 가졌느냐는 서로 다를 수 있다. 너와 나 중에 어떤 한 사람은 일어설 힘조차 없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그럼에도 삶을 살며 앞으로 나아가야지 할 정도의 힘은 있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수잔과 치에코가 전자에 해당된다면 리차드와 야스지로가 후자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갑작스러운 사건 사고. 어떤 악의도 없는 작은 일 하나가 내 삶에 돌이킬 수 없는 파문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이것은 삶이 가진 본질적인 속성이다. 삶이란 본디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리차드와 야스지로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 두 사람은 각기 한 가정의 가장으로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남아 있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감을 크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역시 상처를 받았다. 자신의 상처도 추스르지 못한 상태에서 타인의 회복에,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기에 리차드가 수잔에게 내민 테라피는 한없이 가벼웠고, 치에코에게 아빠 야스지로는 너무 멀리 서 있는 존재였다. 불행이 불행을 불러오듯 아내 수잔마저 잃을 위기에 처했지만 고통이란 실상 우리에게 유익이 될 때가 많다. 예기치 못한 큰 고통이 리차드가 그토록 원했던 아내와의 관계 회복에 물꼬를 트게 한 것이다. 생사의 경계에서 두 사람은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고, 수잔은 리차드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리차드는 수잔을 구해낸다. 

야스지로 역시 아이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그 마음에 새살이 돋게 할 수 있는지는 몰랐다. 벌거벗은 채 테라스에 기대에 서 있는 아이를 보며 아빠는 현재 아이가 어떤 마음의 상태인지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우리는 아프다. 내 아이는 아프다. 그래서 그냥 말없이 아이를 꼭 안아주는 것으로 마음을 나눈다. 그리고 이렇게 벌거벗은 채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절규하고 있는 자신을 안아준 아빠의 진심에 아이는 맘껏 눈물을 흘린다.


이 두 가정이 소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손을 내민 사람도 역시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일으켜줄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소통도 내 안에 에너지가,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리차드의 가정엔 수잔의 사고라는 고난이, 야스지로의 가정엔 치에코의 기행이라는 고난이 두 사람에게 힘을 준다. 아내를 살려야 한다는 강한 의지, 아이를 건져내야 한다는 의지가 고난으로부터 생성된다. 고통의 시간을 잘 통과한 사람이 힘을 갖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흐메드와 아멜리아는 어떠한가.

아이들에게 총을 주고 집을 비운 아버지로부터 이 가정의 비극은 시작되는 것일 테다. 우리가 항상 온 정신을 차리고 모든 것을 신경 쓰며 살 수는 없지만 가축을 지키라는 명목으로 어린아이들에게 총을 맡기는 어리석음은 안이함에서 온 것이다. 아멜리아도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불법체류가 적발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큰 일 없이 지내다 보니 이제는 자신이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된 것이다. 망각은 안이함을 불러오고, 이것은 아멜리아가 만취한 조카의 차에 리차드의 두 아이를 태웠다는 것으로 다시 한번 증명된다. 

그렇다고 이들이 최종적으로 맞이한 결과가 합당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모로코 경찰은 아흐메드와 유세프라는 소년들에게 처음부터 강압적이었고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총을 쐈다. 애초에 이들은 저들과 소통할 생각이 없었다. 아멜리아를 대하는 미국 경찰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아멜리아와 소통할 생각이 없다. 그저 일어난 사실,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말을 할 뿐 듣지 않는다. 소통이랑 상대의 말을 들을 의지가 있어야 시작될 수 있다. 상대의 생각, 의견, 형편을 궁금해하지 않는 자들과는 불통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가까운 이들과, 사랑하는 사람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싶다면

먼저 내 안에 힘이 있어야 한다. 내 아픔이 잦아들 시간을 나에게 주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내민 손이 가볍지 않고, 몇 번이고 손을 내밀 수 있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너를 궁금해하고, 들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들음으로써 알게 될 당신의 이야기를 향한 기대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변화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오늘 나 스스로를 보듬고, 당신을 들을 준비를 하는 내가 되어 마음을 나눌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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