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를 걷다 보면 맞은편에 걸어오는 사람과 부딪히기를 피하려 어깨를 말아서 지나갈지 피고 지나갈지를 고민하는 때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맞은편의 사람은 어깨를 필지 말지를 고민해 보면 생길 경우의 수는 네 가지. 날갯죽지끼리 만날지, 가슴팍끼리 만날지, 날갯죽지와 가슴팍이 만날지. 가능하면 같은 자세로 서로를 지나치는 편이 보기엔 더 좋지 않을까. 종이학을 접으려 접은 이등변 삼각형 모양의 학종이를 펼쳤을 때 학종이에 그인 줄이 선명할 때의 기분같이. 그때 누군가는 내게 그냥 지나치면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나치는 건 지나쳐야만 하는 것과 다르다. 지나침에 더는 기대도 사랑도 걸지 않는다는 그 사람의 말이 조금은 아프다.
한때는 사랑을 믿었다고 말했던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 그런데 믿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누군가 방금 쏟은 지하철계단으로 굴러가는 사과들을 지나치지 않는다거나 고작 왕복 2차선의 도로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것들. 그런 행동들은 인간들에 대단한 믿음으로 시작하는 게 아니니까. 사랑을 믿지 않지만 본인도 모르게 사랑하고 있는 것들도 있지 않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은 타인에겐 내가 마치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 말이다.
월백설백천지백 산심해심객수심이라. 달도 눈도 천지가 희니, 산도 바다도 나그네의 시름도 깊도다. ‘산심야심객수심이다 이놈아.’ 대체로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거는 쪽은 나였는데, 잘 생각해 보면 그런 시비로 나는 내가 단단하게 기억한다고 자위하는 시절이 있었다. ‘깊다’는 형용사에 집중하면 ‘산’과 ‘밤’이 더 어울려 보이지만 ‘산’과 어울리는 단어에 집중하자면 ‘밤’보다는 ‘바다’가 더 어울리지 않는가. 말장난엔 늘 의도가 웅크려 있다. 의도를 파악치 못한다면 그건 무엇도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목각인형에 불과한 것이니. 목각인형은 말을 할 수 없는데 그럼 말장난도 못하잖나. 그러면 말장난을 치는 인간들은 목간인형보다 나을까. 아니. 절대. 늘 가르침을 매번 주시는군요. 권여선 선생님.
다른 마음은 잘도 따라 하면서 자신을 따라 하는 일은 못하는 못난 마음가는 부류들. 날갯죽지와 가슴팍의 차이에 ‘법적으로 문제가 없지 않냐’라는 의도도 없는 무례한 대답은 술목관계를 완성하기가 어렵든 간에 술이건 목이건 그 한 음절조차 주인이건 나무이건 상관없이 이용하는 못된 주인공 심보에 불과한 거다. 아픔의 결을 결대로 찢는다면 그 셀 수 있을 결들을 무한히 자를 구석이라 환영하는 못난 눈빛들을 반기지 않으리. 정말로 사랑을 하지 않나 너는?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시궁창에 썩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그래도 또 다른 시궁창에 살지는 말게. 잘 지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