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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연춘추 Dec 24. 2021

1.10 “행운섬”과 스트랫포 출신 지정학자들(하)

중국의 공격적인 팽창 정책으로 인해 미국의 서태평양 이권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워싱턴의 정치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놓여있었다. 하나는 아시아에서 중국의 지정학적 지위를 인정하는 대신 베이징과의 협력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길이고(이는 브레진스키와 키신저가 제시한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 패권을 포기하는 대신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동시에 적으로 돌리는 길이었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 당시, 워싱턴에서는 아직까지 브레진스키가 제시한 미국-중국-일본 삼국 체제를 깰 만한 지정학적 대안은 없던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오바마 정부는 중국과 협력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최대한 협력하면서 중국 주변에 위치한 몇몇 나라와의 관계를 돈독이 함으로써 중국의 팽창을 억제하려 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프리드먼의 《100년 후: 22세기를 지배할 태양의 제국 시대가 온다》는 미국인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프리드먼이 보기에 중국과 러시아는 국토 면적만 넓을 뿐이지, 이들 내부에는 다양한 인종 문제와 인구구조적 결함이 있으며, 양국 지도층은 이 같은 내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프리드먼은 러시아가 자신들의 지정학적 약점-자연 장애물로 삼을 수 있는 산맥과 하천이 전무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에, 캅카스와 중앙아시아를 자국의 영향력 아래 두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병합을 시도하리라 내다봤다. 특히나 그는 러시아가 2015-2020년 사이, 폴란드와 발트해 3국을 위협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춘 다음, 이들에게 군사적 압박을 가해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거대한 중간지대를 만들 것이라 내다봤다. 이를 위해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로 하여금 중부 유럽 문제에 있어 자신들과 타협할 것을 요구하겠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가 미국과 더 가까워지는 결과를 불러오리라 봤다. 그리고 2020년 이후 러시아는 다시금 캅카스 일대의 인종 문제와 인구 구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하리라 내다봤다.


중국에 대한 프리드먼의 평가는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이 책에서 프리드먼은 중국을 “사실상 섬”이라 평가하며, 중국이 티베트 고원과 톈산산맥, 알타이 산맥 등 내륙 고원지대로 인해 중앙아시아와 격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은 중국이 저임금 노동력과 막대한 부채로 지금까지 경제 성장을 이어올 수 있었지만, 중국인들은 충성심이 없으며, 경제적 이익을 매개로 베이징 정부에 충성하는 상황이라, 만일 중국이 더 이상 빠른 경제 성장을 하지 못할 경우, 지방 정부 단위로 분열될 것이라 예측했다. 프리드먼은 2020년 전후 중국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중국의 “황금해안” 지대는 일본 자본의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이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재편을 불러올 것이라 예상했다.


프리드먼의 이 같은 지정학 비평은 카플란과 자이한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들을 프리드먼의 충실한 계승자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러시아에 대해서 카플란은 이들의 팽창 자체가 대평원이 끝없이 펼쳐 있는 자연환경 특징 때문에 방어 공간 확보만이 수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며, 이 때문에 러시아는 끊임없이 외부로 팽창할 것이라 내다봤다. 무엇보다 소련 정권의 수립과 이들의 지속된 심장지대 팽창은 러시아로 하여금 유럽 국가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아시아 국가로서의 특징을 가지게끔 만들었으며, 이는 나아가 소련으로 하여금 중동과 인도차이나 방면에서 가해오는 미 해·공군 역량의 압박을 느끼게끔 만들었다(카플란은 이것이야말로 냉전의 지정학적 진실이라 생각했다). 아울러 새로운 에너지 개발로 인해 EU의 대러 자원 의존도가 줄어들 것이라는 프리드먼의 예상과 달리 카플란은 유럽 동부와 발칸반도의 대러 자원 의존 상황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될 것이며, 이는 러시아가 EU 국가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제적 기초라 봤다. 아울러 카플란은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자원 의존도와 높아져 가는 중국, 인도, 이란의 대 중앙아시아 영향력을 근거로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은 어려우리라 예측했다.


중국의 팽창에 대해 카플란은 베이징 지도부가 심장지대와 반월지대 진출을 동시에 감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베이징은 거대한 인구가 경제 성장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앙아시아 5개국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 주변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안전한 자원 수급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는 세계섬에서 중국의 영향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 내다봤다. 이 같은 중국의 해상 팽창을 막기 위해 카플란은 ①중앙아시아에 배치한 미군 기지를 통해 군사력 압박을 가함과 동시에 ②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통해 둥베이 지역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카플란은 가까운 미래에 중국이 미얀마와 태국, 말레이시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로 성장할 것이며, 중국의 이 같은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인도네시아는 미국의 새로운 우방이 되리라 예측했다.


타이완 문제에 있어 카플란은 서태평양 이권을 둘러싼 미·중 양국의 충돌이 불가피하며, 중국의 해·공군 역량이 강해질수록 미국이 타이완을 지키기 위해 투입해야 하는 힘의 총량도 빠르게 증가할 것이라 내다봤다. 만일 미국이 중동 지역에서 철수한 상황에서 해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우발적 전투 가능성을 실제보다 낮게 평가할 경우, 타이완을 둘러싼 미·중 양국의 해상 전투는 얼마든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중국의 해군력이 미국, 일본과 정면 대결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타이완 지배권을 둘러싼 전쟁만은 피하려 할 것이라는 프리드먼의 예측과는 다른 것으로, 오늘날 미국의 60%대 해상 전력을 가지고 타이완 해협을 위협하는 중국 해군의 도발 행위를 생각하면 비교적 정확한 예측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카플란이 전통적 지정학 이론에서 출발해 세계사의 흐름을 예측하고자 했다면 자이한은 자원 의존도를 통해 미국이 더 이상 세계 공급망 보호를 위해 유라시아 대륙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The absent super power: The shale revolution and a world without America, 2017)》에서 셰일 혁명은 오로지 미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으며, 리비아와 러시아, 중국 등지에서는 이 같은 자원 혁명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로 들면 중국의 경우, 스촨四川 분지는 미국과 유사한 형태의 셰일층 분포를 가지고 있지만, 만일 이를 개발할 경우, 분리주의 운동이 일어날 것이며, 베이징은 이를 용납하지 않으리라 봤다. 반대로 중동의 경우, 이미 기존 원유 수출로도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다 보니 셰일가스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셰일층 분포와 기술 문제 때문에 셰일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따라서 셰일혁명은 오로지 미국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미국이 가진 자본력과 셰일가스 매장량, 법적 규제와 기술적 경험이 결합된 결과라 봤다.


자이한이 보기에 미국이 변동성 낮은 물가를 유지할 수 있는 요인은 총 1,200마일에 달하는 미시시피 강 수로 때문이라 봤다. 미시시피 강을 토대로 발달한 수로 운송체계로 인해 미국인들은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곡물을 사방으로 운송했으며, 이는 식비와 교육비, 교통비 등 생활 전반의 물가 안정성을 보장했다. 여기에 더해 로키산맥과 애팔래치아 산맥은 미국인들이 공업 개발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제공해 주었기에, 서구 열강과 다르게 제국 체제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광활한 아메리카 대륙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경제적 저력은 미국을 오늘날과 같은 초강대국 지위에 올려놓았다. 브레튼-우즈 체제로 새로운 자유무역 질서를 만든 미국은 전 세계 해양 무역을 보호하는 대가로 자신들이 새로이 정한 규칙을 따를 것을 요구했으며, 이 같은 규칙을 따르는 대가로 미국은 자국 시장을 전 세계에 개방했다. 오늘날 미국은 독일과 한국의 주요 수출국일 뿐만 아니라, 영국과 일본이 또다시 제국이 되는 것을 막고,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정치적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틀을 제공하고 있지만, 이는 미국 중산층의 극심한 피로를 동반했다.


그리고 이런 피로에 지친 미국의 중산층들에게 자이한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 우리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0% 내외에 불과하며, 이중 1/3은 NAFTA 국가와의 거래에서 이루어진다. 이제 셰일혁명까지 일어난 이상, 미국은 더 이상 자원을 중동 지역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며, 우리의 혈세를 들여가면서 해외 주둔 병력을 배치할 필요가 없다. 미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고 필요할 때만 세계에 개입해야 하며, 우리가 물러나면 전 세계는 미국의 시대를 그리워하며 또 다른 혼란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이한은 미국이 떠난 자리에 러시아와 EU, 일본과 중국,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정학 대결이 펼쳐질 것이라 주장하며, 아래와 같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EU와 러시아의 경우, 자이한은 오늘날 러시아가 소련에 비해 국토 면적은 줄었으나 지켜야 할 국경선은 늘었음을 지적했다. 여기에 더해 러시아 내부의 인종 문제와 인구구조 문제, 그리고 자원 수출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경제구조 등은 훗날 러시아를 몰락으로 이끌 것이라 지적하며, 러시아에게는 아래와 같은 3가지 길이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는 노동력 가치 향상으로 이를 막는 것이며, 둘째로는 중앙아시아 등지의 이민을 받는 것이며, 셋째로는 동유럽 진출을 통해 자국의 방어선을 줄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는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합병한 다음,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루마니아, 몰도바,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의 일부 또는 전체를 흡수하리라 봤다. 이 중에서 자이한은 세 번째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높게 쳤다. 2014년 이래, 러시아는 크림반도와 돈바스 반군, 트란스니스트리아 등지에 병력을 배치했으며, 한 달 만에 키예프를 점령할 수 있으리라 봤다. 이처럼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회복한 크렘린궁은 자신들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서진을 감행하여, 발트해 3국과 아제르바이잔, 몰도바, 루마니아 등지를 점령할 것이며, 비스와강을 경계로 폴란드를 나누려 할 것이라 예상했다.


아시아 대륙의 경우, 자이한은 일본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시작되리라 봤다. 그는 일본이 가진 자본력과 세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해상 전력, 그리고 100%에 근접한 일본의 대외 자원 의존도에 주목했다. 자이한은 일본이 태평양 너머에 위치한 아메리카 대륙과 호주로부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있다 보니, 미국이 물러난 서태평양의 지배자는 일본이 되리라 예상했다. 구채적으로 자이한은 일본이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사할린과 북방 4도를 러시아로부터 빼앗은 다음, 베트남과 미얀마, 필리핀 등지에 해군기지를 설치해 자원 공급망을 재편하고, 한국에게 선택을 강요할 것이라 예측했다. 중국의 경우, 자이한은 프리드먼과 같이 비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는데, 그는 중국이 대평원 지대에 위치한 북부와 해외 자원 의존도가 높은 남부 해안지대로 나뉜다고 설명하며, 만일 중국이 타이완을 침공할 시, 남부 해안지대 도시들은 극심한 에너지 부족에 시달릴 뿐 아니라, 해양세력과 결탁해 중앙정부에 반항하는 상황까지 일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비록 자이한은 중국이 일본 해상자위대의 봉쇄망을 뚫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는 중국은 필리핀의 분리주의 운동을 지지하거나 한국을 회유하는 방식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세력을 확장하리라 예상했다. 따라서 그는 중국의 이 같은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 타이완, 필리핀, 베트남 등이 뭉칠 것이며, 자유를 갈망하는 미얀마 정부도 여기 합세해 중국의 에너지 공급망을 흔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리고 이 같은 일본과 동맹국들의 중국 봉쇄는 중국의 수출 루트를 가로막을 것이고, 종국에 이르러 중국 경제의 몰락을 불러오리라 예상했다.


오늘날 자이한의 주장을 살펴보면 우리는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그의 예측이 상당 부분 빗나갔음을 알 수 있다.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과의 싸움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원래 확보했던 자치령 상당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또한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해군 함정을 건조하고 있으며, 2030년까지 미국에 준하는 해군력을 보유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미 일본 본토를 위협할 항공 능력을 갖춘 중국과 달리 일본은 번번한 함재기 하나 없는 상황이고, 이조차 해상자위대가 중국과 동등한 수준의 항공 전력을 가질지 미지수다. 일례로 일본은 이즈모급出雲級 헬기구축함 한대당 F-35를 20여 대 정도 탑재한다고는 하나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한 반면, 중국은 이미 J-22 개량형을 항모당 36대 정도 탑재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동중국해 주변부에 위치한 지대공, 지대함 미사일 전력까지 고려할 경우, 우리는 중일 양국 해군의 전투 결과가 중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예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이 필리핀, 베트남 등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을 조직해 중국을 억제하는 시나리오는 그리 현실성 있어 보이지 않다.


심지어 자이한은 중국과 파키스탄의 사실상 동맹관계와 중국이 추진하는 지정학적 건설 사업-파키스탄 경제회랑과 이란-파키스탄 송유관 건설 계획이 미칠 파급효과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다. 물론 자이한이 중국의 원유 수송 루트에 대해 아무런 이해가 없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는 중국-카자흐스탄 송유관과 러시아-중국 송유관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중국이 이란에 석유 시추 관련 기술자들을 파견한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과 일본 간의 지정학 전쟁 시나리오를 쓸 때, 자신이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을 다루고 있음을 망각하고, 대륙으로 이어진 국가에 대한 해상 봉쇄가 생각보다 경제적인 타격을 줄 수 없다는 헬페리히의 교훈을 잊어버렸다.


비록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는 사실 오류와 편향성 등 문제가 존재하지만 미국 내 백인 중산층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백악관의 오랜 개입주의 노선과 호라산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에서의 전쟁에 지친 백인 중산층이 보기에 자이한의 비개입주의 노선이야말로 신세기 복음이자,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정치적 주장이었다. 오랜 세월 백악관의 개입주의 노선에 의문을 품던 백인 중산층들은 이 젊은 전략가의 비개입주의 노선에 열광했으며, 보스턴 항구에서부터 산타모니카에 이르는 도시의 퍼블릭 하우스에서는 개입주의자들과 비개입주의자들의 열띤 논쟁이 이어졌다.


이 같은 개입주의와 신-먼로주의자들의 논쟁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결합하여 미국의 대외 정책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트럼프는 한국과 독일, 시리아, 이라크에서 철군할 것을 지시함으로써 기존 동맹국과 지속적인 마찰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탈레반과 평화 협정을 체결한 다음 주 아프가니스탄 미군에게 크리스마스 철군을 지시함으로써 가니 정부의 빠른 몰락을 초래했다. 그리고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소식을 전해 들은 베이징과 모스크바는 친미 세력을 중앙아시아에서 몰아낼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파키스탄 정부와 탈레반의 후견인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시르다리야 강 남쪽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호라산 지역에 강력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오늘날 세계질서는 기존 패권국인 미국과 반-패권주의 기치 아래 뭉친 중·러 군사협력체의 대립이라 정의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세계질서가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는 스트랫포 출신 지정학자들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시종일관 미국의 위대함과 강함, 그리고 특별함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정작 그 위대함과 특별함이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미국을 패권국가 반열에 올린 스파이크먼-브레진스키의 개입주의 노선을 경멸했으며, 미국은 구대륙과의 교류 없이도 행복한 삶을 영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미국의 특별함은 결단코 미시시피강을 기반으로 하는 내륙 수운이나 강력한 해군력, 그리고 풍부한 자원 매장량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미국이 패권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상호 견제가 가능한 권력 구조와 자유주의에 기반한 경제 시스템, 지정학에 기초한 개입주의 노선 때문이다. 그러나 스트랫포 출신 지정학자들은 이 중에서 패권과 직결된 개입주의 노선을 비판함으로써 미국을 전 세계적 패권국에서 다시금 고립된 먼로주의 국가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무엇보다 스트랫포 출신 지정학자들은 기존 지정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던 전략지대 비평을 없애 버리고, 정치지대 비평만을 다룸으로써 스스로 세계 전략을 다룰 역량이 없음을 증명했다. 어찌 보면 지리학의 아류이자 현실정치 참여 수단인 지정학이 현실 세계를 다루는 다른 학문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던 까닭은 전 세계를 거대한 유기체로 보고, 자연환경과 인종·자원 등 국가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의 공간 분포를 통해 공간 내 자원의 효율적 사용 방법 또는 이상적인 국가전략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고로 세계질서를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그리고 분쇄지대 세력의 대립으로 보는 전략지대 비평은 지정학의 정수요, 정치지리학의 학문적 근간이라 할 수 있으며, 반대로 전략지대 비평이 사라진 지정학은 레벤스라움(Lebensraum) 확보를 목표로 하는 내셔널리스트들의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스트랫포 출신 지정학자들은 전략지대 비평을 외면하고, 정치지대 비평만을 다룸으로써 지정학을 강대국 간의 이상적인 힘의 균형을 추구하는 학문에서 내셔널리즘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이 때문에 그들은 개별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적 우위만을 생각했을 뿐, 심장지대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동맹체를 형성할 때 미치는 파급효과와 그로 인한 영향력을 계산하지 못했다. 스트랫포 출신 지정학자들의 이 같은 학문적 시도와 이들의 비개입주의 노선에 기초한 트럼프 정부의 대외 정책은 참담한 결과로 이어졌다. 중국과 러시아, 이란 3개국이 반-패권주의 동맹을 형성한 다음, 중앙아시아에 마지막 남은 친미 정부를 몰아낼 때, 워싱턴은 가니 정부의 몰락을 지켜만 봤으며, 스트랫포 출신 지정학자들의 예측은 휴지조각처럼 땅 아래 떨어졌다. 자이한은 애써 아프가니스탄의 지정학적 가치를 폄하하며, 이 지역을 잃어버린 들 미국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으나, 이는 자이한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과거 중앙아시아에 미군 기지가 있을 당시, 미군은 러시아 남시베리아 공업지대와 중국의 자원 공급망을 파괴할 수 있었으며, 이 때문에 중국과 러시아는 양면 공격을 받을 위협에 처해 있었으나, 아프가니스탄을 빼앗긴 현 상황에서 양면 공격을 두려워해야 하는 쪽은 중국이나 러시아가 아닌 미국이다. 현재 미군이 가진 전력으로 중국 또는 러시아와의 개별적 전쟁 수행은 가능할지 몰라도 대서양과 서태평양 방면에서 압박을 가하는 중·러 군사협력체의 도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당장 미군의 직접적 개입 없이는 친미세력이 군사적 열세에 놓일 수 있음을 확인한 베이징과 모스크바는 타이완과 우크라이나 방면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한 다음, 하루가 멀다고 자신들의 무리한 요구 사항을 워싱턴에 전하고 있다.


스트랫포 출신 지정학자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는가? 그들은 미국 백인 중산층이 듣고 싶어 하던 주장을 함으로써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으며, 정계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입에 달면 배에 쓴 법이요, 달콤함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그들은 미국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은연중에 가능한 반-패권주의 동맹체의 형성 가능성을 묵살했을 뿐만 아니라, 지정학의 학문적 근간인 전략지대 비평을 무시하거나(프리드먼, 자이한), 애써 의미 축소함으로써(카플란) 자신들이 보고 싶은 현실만을 봤다. 실상 그들은 지정학을 단순히 “행운섬”에 대한 미국인들의 믿음을 굳히는 수단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이 지정학을 단순히 정치지대 연구 수단으로 전락시킬 때, 지리의 복수는 시작됐다. 그 결과, 미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주도권을 중·러 군사협력체에게 빼앗겼으며,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처럼 양방향에서 오는 적과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하우스호퍼 지정학으로 인해 전 세계가 전쟁터로 변한 것을 목격한 스파이크먼은 지정학을 강대국 간의 힘의 균형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했으며, 전후 80년 동안 대다수 지정학 연구자들은 이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스트랫포 출신 지정학자들은 지정학을 다시금 국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전락시켰으며, 전략지대 비평을 지정학의 강단에서 몰아냈다. 그 결과, 우리는 또 다른 냉전에 직면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의 지정학이 아닌 안정된 질서와 힘의 균형을 추구하는 또 다른 평화의 지정학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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