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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유 Sep 01. 2023

브롬톤


  좀처럼 기대되지 않은 여행이었다. 이렇게 설레지 않은 여행은 처음 같았다.


  런던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았다. 런던 담당자에게 모두 위임한 탓이기도 했지만 기대가 없으니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런던 담당자가 항공편 지연으로 내가 먼저 런던에 도착하게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아무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런던을 만났다.  


  런던의 여름은 서울의 초가을과 닮아 있었다. 고개를 들면 파아란 하늘이 올려다보였고 거리엔 청량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분명 가을 기운이 느껴지고 있는데도 사방엔 온통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초록들뿐이라 신비로웠다.


  맞다. 런던은 지금 반칙을 쓰고 있었다. 산뜻하고 상쾌한 여름이라니 너무한 거 아닌가. 오로지 고온다습의 여름만을 겪은 내 인생이 좀 억울했다. 아니 누가 런던 날씨가 아니 좋다고 했던가, 그건 음모나 다름없었다. 산뜻과 상쾌로 정리되는 런던의 여름을 자기네만 겪고 싶은 욕심에 런던의 날씨를 거짓으로 말한 게 틀림없었다. 런던 스스로 뿐만 아니라 런던을 아는 자 모두 반칙과 권모술수를 쓰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 었다. 어디 두고 보자. 나도 돌아가면 똑같이 말하고 다닐 거다. 나도 한다면 하는 자니까. 아무렴 나만 당할 수 없지.


  브롬톤, 언젠가 내 손에 쥐고 싶은 내 로망이 서린 자전거의 본고장이 바로 런던이었다. 자전거 도로가 매우 잘 되어있었는데 고개를 돌릴 때마다 내 로망이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아니하고 사라져 갔다. 이건 마치 신기루, 나를 한 껏 약 올리며 지나가는 그치들 때문에 현기증이 날 거 같았다.


 브롬톤 매장이라도 가야 할 것만 같았다.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브롬톤과 런던을 초록창에 새겨 넣었다. 어떤 이는 자기 남편이 런던 여행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브롬톤 매장을 가자 눈이 반짝거렸다고 했다. 내 얘긴가 싶었다. 어떤 이는 가족여행을 왔다가 가족들보다 2시간 먼저 일어나서 브롬톤을 빌려 탔다고 했다. 아니 잠깐, 빌려 탔다고?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내 눈이 반짝거리는 순간이었음을.


  브롬톤 대여 앱을 통해 24시간 동안 5파운드만 내면 브롬톤을 타볼 수 있었다. 와.. 브롬튼을 단 돈 5파운드에 탈 수 있다니.. 런던 담당자만 아니었다면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침 숙소 근처에 브롬톤 대여 독(Dock)이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브롬튼 독 앞이었다. 앱을 통해 독을 열었다. 선글라스를 썼어야 했다. 영롱한 자태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강렬해서 하마터면 시력을 잃을 뻔했으므로.


  런던.. 이 낭만의 도시 같으니라고! 누가 런던을 반칙왕이라 했던가? 어느 누가 런던을 아는 자 모두 권모술수를 부린다 했었나? 브롬톤의 페달을 힘껏 밟은 그 순간부터 런던은 낭만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한달음에 이리로 저리로 달렸다.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아름다운 것 투성이었다. 파아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과 따사로운 햇살에 비치는 런던의 모습들이 그제야 선명해졌다.


  런던은 낭만이었다.



  브롬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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