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엔딩 케이크 러시 일러스트by하노이민언냐
바빴겠지 아니 바빠야만 했어. 남편, 네 녀석은 화장실도 못 갈 정도로 바빴던 것이다. 숟가락이 젓가락인지 포크인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어. 그래야 너의 죄를 사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
8월이면 대망의 남편 생일! 아이들은 이미 선물 준비로 분주하다. 모아둔 용돈을 큰맘 먹고 올인할 생각인 아들, 쭌이는 연신 선물을 검색하고 엄마에게도 슬쩍 공유한다. 여동생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일급비밀로 붙이는 모습이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아들아~ 헛키우진 않았구나.
그러고 보니.. 올해 내 생일이 어땠더라. 달콤하다 못해 평생 섭취할 당분을 죄다 흡입한 그날! 올해는 그야말로 공포와 혼란의 절정이었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 태어나버린 1인! 그래서일까. 한 여름, 약한 선풍기 바람에도 오들오들 떠는 추위 최약체이지만 내면은 뜨겁게 불타오르는 정열적인 성향을 타고났다. 겨울적 봄스러운 모순의 인격체! 그리고 40을 훌쩍 넘기고 보니 꽂을 촛불이 많아져 서글퍼지기 시작한다. 마냥 축제 같았던 생일이 이젠 기쁘지만은 않은 건가. 그래서 초는 라지 4개에서 올스톱하기로 했다. 여기서 더 이상 보태지 않기로 약속해요~
천생 엔지니어인 남편! 하지만 해마다 갱신되는 숫자에는 취약하다. 특히 아이들 학년, 나이 등 매년 결혼 연차도 묻지 말라는 그! 하지만 플리즈, 아이들 나이정도는 외워주세요. 딸이라면 자가다도 벌떡 일어나는 국가대표 딸바보지만 학년을 매번 틀리곤 쩡이에게 원성을 사고 있다.
특히 결혼기념일과 와이프의 생일이 2주 간격인 우리 부부! 남편은 일타쌍피로 한방에 결기와 생일을 해결할 수 있는 행운의 남자(?)다. 결혼기념일은 서로 축하할 경사지만.. 원래 와이프가 더 축하받는 게 국룰..이라고 굳건히 믿고 싶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편안한 하루를 선사하고자 결심했다. 특별한 날은 좋은 추억 아니면 짠내 나는 사연 둘 중 하나잖아요. 물론 우린 주로 후자지만… 쿨럭… 이번 기념일의 콘셉트는 ‘현모양처!’, 너로 정했다. 외식보다는 뜨끈한 저녁 상을 차리고자 야심 차게 준비했다. 여느 주재원 가정이 그렇듯 남편들은 과중한 업무로 희생의 아이콘이 된다. 새벽 5시에 기상 6시경 출발 그리고 10시 귀가인 루틴의 남편! 일주일 중 하루를 쉴까 말까 한 살인적인 업무환경에 치일 남편을 위해 3시간 30분을 요리에 올인했다. 평일이라 외식이 부담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정성 듬뿍 집밥을 대접하고 싶었다. 아이들도 요리에 진심인 엄마를 보자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오랜만에 최애 메뉴인 불고기, 잡채 각종 나물 등이 총집합하니, 덩달아 설레어하며 아부지의 귀가만 손꼽아 기다렸다.
‘딩동! 딩동!’
경쾌한 초인종 소리 그리고 칼퇴한 아부지! 하지만.. 설마 설마 했던 남편의 빈손 귀가라니.. 제아무리 바빠도 꽃 한 다발은 안고 와야 하는 거 아니요~ 하노이에서 널리고 널린 게 꽃이며(집으로 오는 길엔 하노이 최대 꽃 시장이 있다.) ‘알라뷰’라고 쓸라면 쓰고도 남을 종이 편지도 없다. 호환마마보다 더욱 무섭다는 ‘결혼기념일 빈손 귀가’인 것이다. 사실 축하 메시지도 점심을 훌쩍 넘긴 오후에 왔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급 기억을 더듬어 서두른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잊었냐, 이미 늦었다’ 등의 질타를 선사할 테지만 그저 두 눈을 질끈 감았던 나다. 오늘은 천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현모양처 콘셉트이니깐~
그러나! 쫄래쫄래 빈손으로 세상 어느 때보다 산뜻한 발걸음으로 돌아온 해맑은 용자여~ 이건 손목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야. 특별한 날에는 뭐든 터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너란 남자! 꼭 그랬어야 했냐.
그러고 보니 낯설지 않다. 말로만 듣던 데자뷔가 이런 느낌일까. 작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일요일 집 앞 레스토랑을 스스로 예약한 와이프는 그날도 분노의 축지법으로 탈주했다. 무 선물, 무 편지, 무 꽃에 충격을 받던 와이프! 눈만 꿈벅이며 서로를 용서하기엔 그대도 나도 함께 한 세월이 너무 길다. 이젠 수고하여 성의를 보이고 노력하지 않으면 확인이 되지 않는 애정이 아닌가. 동네 레스토랑이었기에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 홀로 눈물의 귀가한 게 떠오른다. 햇살이 따뜻하던 봄날, 호떠이 공원 벤치에서 분노에 떨며 흐느끼던 한국인을 보셨나요? 그게 바로 저랍니다.
대환장 기념일은 2023년에도 투 비 컨티늍!
사실 비싸고 폼 나는 선물을 선사하는 기특한 날도 있었다. 아이패드나 반짝이고 쪼그마한 목걸이 같은 거 말이다. 그때의 패드 덕분에 평생 남의 것이라 여기던 블로그, 브런치로 글도 쓰고 말이다. 하지만 3년 전이라는 사실! 이젠 기억 속에 희미해지는 중.. 훗.. 평소 셀프 선물, 이른바 ‘남편카드 찬스’에도 쿨한 남편이다. (얼마 전 하사하신 아디다스 운동화도 잘 신고 있어요.) 사실 카드보다 더 안전한 선물도 없다. 하지만 기념일은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빈손은 아니잖아~
그렇다고 이벤트를 원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쪽에서 격한 사절이다. 잠깐의 이벤트가 남기는 건 기승전 쓰레기거든요. 치우는 것도 결국 내 몫이고 말이다.
올 아이 원트 포 기념일 이즈~ 손 편지 앤 꽃!
이거면 단순한 와이프는 일 년 내내 광대승천 각이요~ 하지만 제때 받는 건 고사하고 긁어서 짜내어 받는다는 사실! 기념일의 다른 말은 ‘바가지’, 아닌가요~ 그렇게 결혼기념일의 살벌한 구박에 각성한 남편은 생일에는 반드시 만회하겠노라고 선서했다. 그러고 보면 결혼기념일에서 2 주 뒤가 생일이라 얼마나 다행인가. 죽으란 법은 없지.
하지만 그때만 해도 몰랐다. 굳은 결의로 앙 다문 입술이 어떤 후폭풍을 가져올지 말이다.
화요일에 생일을 맞이한 나는 이날도 시큰둥했다. 그의 선언은 신용을 잃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당당한 자태로 퇴근한 남편!
예상을 뒤엎고 무거운 양손과 한껏 올라간 좁은 어깨 그리고 씩씩한 발걸음이었다. 한 손에 들린 건 개업식 포스의 초대형 꽃바구니! 그리고 다른 손에는 대형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 평생 이런 큰 꽃바구니는 처음이야. 그런 아빠의 등장에 더욱 환호하는 건 아이들이었다. 오늘만큼은 아빠가 해냈구나~하는 표정! 말하지 않아도 안도하는 게 보였다. 긴장 속에 아빠의 귀가를 기다린 건 아이들이었나. 너무 신난 나머지 펄쩍펄쩍 뛰기까지 했다. 코 끝이 찡해진다. 미안함이 쓰나미처럼 밀려드는군요. 극성맞은 꽃, 편지 성애자는 웁니다. 또르르..
그리고 생일이라면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축하 노래다. 물론 거기엔 촛불 켠 케이크는 필수고 말이다. 비록 처치곤란으로 생을 마감하지만 관상용 케이크가 없다면 섭섭하다.
꺄아아악…
일단 숙련된 페이크 돌고래 함성부터 발사! 이럴 땐, 기뻐하고 보는 거다. 와이프는 이제 프로 리액션러니깐요. 하지만 상자를 여는 순간 직감했다. 이건 누가 봐도 본인 취향이 절절하게 반영된 초콜릿 범벅의 케이크다. 괘.. 괜찮아. 새까만 초콜릿 폭탄에 벌써 혈당 수치가 널을 뛰고 호흡곤란에 손이 떨리지만.. 그의 준비성에 기뻐해야지. 취향에 반하는 비주얼에 할 말을 잃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아이들을 봐서 해피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생일의 하이라이트인 케이크 절단식만 무사히 마치면 된다. 그리고 오순도순 둘러앉아 한 조각씩 나눠먹으면 성공적인 마무리! 나이프를 쓰윽 갖다 댔다.
윽.. 뭐.. 뭐냐. 너무 단단하다. 이건 돌덩이인가?
결국 케이크를 따라온 플라스틱 칼은 바사삭 두 동강이 나고 만다. 더 강한 녀석이 필요했다. 결국 과도가 등장하고 안간힘을 다해 커팅을 해보지만.. 소용없다. 케이크가 아니라 돌덩이다. 이런 건 음식이 아니라 무기다. 멋모르고 덤볐다가는 앞니가 와사삭 털릴 수준이니 말이다. 알고 보니 평생 내 돈으로 산적이 한 번도 없는 ‘아이스크림케이크 데스네~!‘
기프티 콘으로 받은 적은 있어도 사비로 산 적은 없는 아이스크림케이크라니..
낑낑 거리며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자, 남편이 거들었다. 하지만 그도 자르지 못하는 강도다. 어.. 어.. 하며 칼을 들고 당황한다. 아이스크림은 좋아하지만 아이스크림케이크는 입에 대지 않는 쩡이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극혐 하는 쭌이도 실망하긴 마찬가지다. 아이들과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뿔뿔이 흩어진다. 케이크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말이다. 이런 모습에 남편은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역시 나의 남자! 마지막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그렇게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던 케이크는 냉대 속에 바이 바이~ 너에게 죄는 없어. 그저 아이스크림케이크는 평생 입에 대지 않는 단호한 취향과 거대 사이즈를 감당하지 못하는 겸손한 사이즈의 냉동실 탓이란다.
슬픈 케이크의 기억이 아련해질 즘이었다. 나흘 뒤, 토요일 오후!
평소와 마찬가지로 출근한 그! 또다시 케이크를 사서 귀가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뭔가 잘못되고 있어! 사지 말고 조기 귀가하길 바랐지만 만회하고자 하는 고집을 꺾지 못했다. 빵만은 사지 말길 신신당부했고 그렇게 케이크만 사기로 극적 타결! 평소에도 식량 플렉스가 대단한 남편은 손이 크기로 유명하다. 자칫 대형 케이크에 크루아상 6개, 마카롱 두 세트는 거뜬히 살 태세였다. 뭘 사 올지 기대보단 불안이 더 컸다. 나 지금 떨고 있니?
딩동
1.5배가 커진 코 평수로 귀가했다. 위풍당당한 아우라가 현관에서부터 풍겼다. 당당하게 내가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라며 건넸다. 식탁에 놓자 텅~ 하는 묵직한 무게감! 이거 낯설지 않아. 그리고 쐬함을 느꼈다. 상자 바닥에 냉기가 돈다.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오픈!
역시 끝날 때까지 끝나는 게 아니다. 이번에도 플라스틱 칼은 어림없다. 무늬만 치즈 케이크다. 사실 받아 드는 순간, 감지한 냉기에서 이미 예감했다. 또 다른 대형 아이스크림케이크임을 말이다. 착잡한 심정의 남편은 직원에게 재차 확인했다고 호소하지만.. 아이들과 나는 또다시 등을 돌릴 뿐이다. 케이크는 또다시 R.I.P. 레스트 인 피스.
그렇게 한동안 케이크 폭격은 계속되었다. 스스로 좋아하는 조각 케이크를 사 먹겠다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차라리 쭌이와 쩡이가 좋아하는 평범한 초콜릿 케이크를 사 오라는 절규를 내질렀다. 그리고 마침내, 절박한 권유를 수용해 평소 아이들의 최애인 평범한 초콜릿 케이크 러시도 겨우 마무리되었다.
돌이켜 보면 2주에 걸쳐 겨우 탈출할 수 있었던 케이크 지옥! 반을 먹기도 버거웠지만 그마저도 본전 생각에 간절한 엄마의 뱃속으로 모두 들어가고야 말았다. 투덜투덜 딱딱한 식감을 불평하며 우걱걱 우걱걱~ 결국 도독한 아랫배에 차곡차곡 쌓였지 말입니다. 씩씩 거리며 먹는 날 가자미 눈에 실소를 머금고 보던 남편! 부지런히 케이크를 해동해 잘라주던 남편! 그 뒤로 2주간 매일 같이 파워워킹을 한 시간씩 했다는 후문이.. 또르르~ 달달하다 못해 당뇨병을 일으키는 과한 당분 소동은 지능적인 계략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기념일 타령을 못 하게 입을 막으려는 고도의 전략??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건 나만 그런가요?
곧 다가오는 남편의 생일로 아이들과 함께 선물을 고민하는 와이프! 어떤 식이든 선을 넘는 남편아, 기대해도 좋다. 선 넘는 건 나도 만만치 않아!
피. 에스. 꽃은 존재만으로도 완벽하다는 주의! 커다란 리본 장식과 바구니만큼 소모적인 게 없다. 심플 이즈 더 베스트, 무늬 없는 누렁이 포장지를 걸쳐도 예쁜 게 꽃이다. 바구니, 포장지 게다가 버리기 찝찝한 본명을 박은 축하 꼬챙이에 대형 플로랄 폼까지! 모든 건 폐기 처분만이 답이라는 불편한 진실.. 지구야, 미안하다~ 죄의식에 몸서리치며 꽃보다 더 큰 장식들을 처분하는 건 내 몫이다. 늘 이야기하지만 제발 평범한 꽃다발에 손 편지만 주길.. 왜 때문에 너란 남자는 모 아니면 도인가. 중용의 미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던 생일! 죄책감 없는 기념일이 가능한 걸까. 안 받으면 서운하고 받자니 찝찝한 기념일! 다음에는 남편 카드로 내가 주문할까.. 번뇌에 빠진다. 챙겨줘도 지랄인 와이프는 그래도 손 편지에 무한 감동했다. 감사합니다, 남편님. 진심으로 감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