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ne with the wind - 단 하룻밤 사이의 이야기
"이봐, 이봐...!"
제럴드의 채근에 맘미는 들고 있던 불이 꺼져가는 것도 모르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열린 창문 사이로 비가 쏟아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그녀를 향해 소리를 치고 있었다. "이봐... 정말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가?"
"아뇨, 마님." 맘미는 한숨을 쉬며 그가 열어둔 창문을 다시 닫았다. 바깥에 쏟아지는 비는 양키 대신에라도 타라를 집어삼킬 듯 굉음의 번개를 내리며 한없이 쏟아지고만 있었다. 이대로 방주가 되어 타라를 벗어나 멀리 떠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분명 들었다고... 이 야심한 밤에... 어떤 양키 놈이 우리 집에 들어온 게 틀림없어...!" 제럴드는 이전의 위엄과 기백을 모두 잃고 바들바들 떨어가며 간질 환자처럼 중얼거렸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단 말이다...!"
"제발, 주무세요. 마님." 맘미는 근처에 놓인 숄을 가져다 그의 어깨에 걸쳐주며 말했다. 그때 갑자기 계단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차단한 등불 사이에 익숙한 얼굴이 문 사이로 삐져나왔다. 엉클 피터였다.
"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요."
"피터,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이 폭풍우 치는 밤에 누가 온다는 거에요?"
"그래도 같이 가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대문도 아니고 뒷문에서 소리가 나요." 피터는 걱정된다는 듯 두 손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노쇠한 그의 걱정 섞인 얼굴이 맘미의 얇은 등불에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좋아요, 피터. 괜한 문을 열어서 오전에 겨우 캐둔 작물이 비에 상하기라도 하면 책임져요."
피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유령의 집이라도 들어가듯 흔들리는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맘미는 피터를 대동하고 어둡고 으슥한 부엌 뒷문 쪽으로 향했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와 창문이 부딪히는 소리, 성난 바람과 구름이 으르렁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이봐요!" 맘미가 대뜸 문에 대고 소리쳤다. 비보가 섞인 오하라 일가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만, 단호하게 문 너머에 닿을 정도만 그렇게 소리쳤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피터, 가서 눈이라도 붙여요. 너무 피곤하니 당신마저 - " 맘미가 말하던 사이, 갑자기 뒷문을 거칠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 봐요! 제 말이 맞죠? 문을 열어줘야 할지도 몰라요."
"양키가 아니라는 법도 없는데, 이런 태풍속에..." 맘미는 잠시 망설이더니 피터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등불을 건넸다. "이거 받아요. 힘은 제가 더 셀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근처의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몇 번 호흡을 한 뒤 문을 열어젖히곤 칼을 들었다.
"세상에, 이봐! 엘리자, 나야 나! 이지라고!"
"이지? 에제키엘 제임스? 정말로 너니?" 맘미는 순간 떠오르는 번개 속에서 익숙한 이목구비의 청년을 알아보았다. 비로 목욕을 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흠뻑 젖은 남자가 뒷문을 통해 부엌으로 들어왔다. "이지? 설마..." 피터가 뒤로 물러나며 바라보았다. 어둠 속 등잔불에 들어온 그 얼굴이 더욱 선명해졌다. 10여년 전, 제럴드에게 주먹다짐을 하고 주인어른에 내쫓겨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던 막냇동생의 모습에 맘미는 칼도 놓치고 그를 안아주었다.
"무슨 일이니...? 어쩌자고 여기까지 온 거야!" 수건으로 빗물을 훔치는 이지를 바라보며 맘미가 물었다.
"누나도 여전하구나. 이 오하라 집구석에서 식솔로 지내다니..."
"그러는 너야말로 어디서 머물다 여기로 온 거야? 어머니는 끝까지 널 걱정하셨어. 마지막까지..."
"어머니가..." 이지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손을 보듬어준 쪽은 오히려 맘미였다. 그녀는 이지의 젖은 손을 붙잡고 그가 뒤늦은 애도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조용히 지켜주었다. 이내 그녀는 피터를 바라보며 슬쩍 눈짓했고, 피터는 대꾸도 없이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결국 내가 어머니 곁을 지키지 못한 것도 오하라 사람들 때문이야. 망할 사람들! 땅을 빌어먹어도 살지 못할 인간들! 난 아직도 기억 나, 제럴드 놈이 누나를..."
"그만, 이지. 그만해." 맘미는 이제 두꺼비 같은 손으로 이지의 등을 토닥였다. 오히려 기억에서 접어둔 쪽은 맘미였다. 오래 전 타라의 여름 햇살이 그 어느 불꽃보다 뜨거웠던 한 낮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젊은 제럴드는 타라의 면화를 재배하는 노예들을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가 시켜서 감독하는 일에 가까웠지만 한 편으로는 일부 노예들이 면화를 빼돌려서 거래한다는 소문이 돌아서이기도 했다.
제럴드는 그들에게 있어 대체로 온화한 주인님에 가까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동년배인 젊은 맘미에게는 친절했다. 제거한 잡초를 옮길 때 도와주거나 파종을 하는 일에서 조금 제외해주기도 하면서 제럴드는 맘미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뜨거운 타라의 햇살 아래에서 맘미를 바라보는 제럴드의 얼굴이 불편했던 건 바로 막냇동생인 이지의 몫이었다. 백인 놈들의 붉은 얼굴 속 형형안 벽안은 속을 알 수 없이 이지러진 목화솜 같았다.
꼬투리에서 면화를 따낸 뒤 얼추 수확한 것들을 큰 자루에 담아 둘러메고 따가운 손을 매만져가며 창고로 향하던 이지는 결국 불편한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처음에는 주변에 불어오는 바람과 뜨거운 햇살로 머리가 어지러워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이내 눈앞의 광경이 명확한 상황을 말해주었다. 그는 이내 둘러메고 있던 자루를 집어던지고 그대로 창고 구석에서 맘미를 겁박하던 제럴드를 붙잡아 때려눕히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힘이 약했던 맘미가 그를 말렸으나 젊은 혈기와 억눌린 분노가 뒤섞인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제럴드가 주변 청년들에게 줄곧 말하던 승마 중 상처는 그때 생겨났다. 주인어른은 맘미에게 1달러를 쥐여주며 이지를 내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들의 엄마가 애원을 해도 소용 없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장마가 시작되는 우기에 이지는 그 거대한 타라를 떠나갔다.
어린 이지를 사랑한 어머니는 그 후로 시름시름 앓다가 다음 파종을 시작하기도 전에 생을 달리했다. 더 엄격해진 감독과 냉담해진 반응의 제럴드 사이에서 맘미는 속을 삭이며 어머니를 묻고 안주인 아래에서 일을 이어 나갔다. 그녀에게 주어진 반응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에제키엘 제임스라는 이름은 이 타라의 오하라 가에서 언급해서는 안 되는 그림자가 되어있었다.
오랜 세월의 회한은 뒤늦게 비를 맞고 찾아온 서른결의 이지로 그녀 앞에 피어나고 있었다. 맘미는 순간적으로 스쳐 간 기억을 애써 지워가며 주전자를 꺼내 들었다. "춥지? 시장하더라도 지금 줄 만한 게 없구나. 차라도 한잔하렴."
그녀가 애써 불을 피워보려 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성냥이 제 몫을 하기도 전에 까맣게 타버리고 수분이 가득한 공기 중에서 잘 붙지도 않았다. 마지막 성냥마저 꺾어버린 그녀는 잠시 주전자를 붙들고 고민에 빠졌다. 그 사이, 옆에서 번쩍이는 뭔가가 불쑥 나타났다. 이지가 들고 있는 것은 낡은 금속통이었다. 표면에 어떤 표식도 없었지만 그녀는 이게 불을 붙이는 도구가 든 틴더 틴이며 제럴드가 가끔 담배를 태우기 위해 사용하던 물건인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북부군에게 빼앗긴 지금, 갑자기 이지의 손에서 들려나오자 난데없이 반가움마저 느껴졌다.
"이지...! 이걸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야. 어디서 훔치기라도 했어?"
이지는 허망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면 그런 질문을 못할 거야. 처음 그곳에 갔을 때부터 갱도에 쳐들어가 일을 쉴 새 없이 해댔지. 동원사업이었고 버는 대로 빼앗기긴 했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졌어. 여기 있는 백인 놈들과 다른 상황이 북부에는 펼쳐져 있어."
이지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는 금속통의 뚜껑을 열어 내부의 부싯돌과 강철을 꺼내 긁었다. 자주 해본 적이 없어 불이 잘 튀지 않자 그대로 이지가 다시 받아들어 부싯돌과 강철을 긁은 다음 차콜 클로스에 옮겼다. 번쩍번쩍 작은 번개처럼 타닥거리더니 금세 밝은 불이 틈새에서 솟아나 장작 일부를 태워 먹기 시작했다.
"그 양키들 이야기하는 거야? 이곳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야만인들 말이야."
"그들은 우리 자유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 거야, 누나. 여긴 그걸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이 난리가 난거고."이지는 침착하게 말했다.
"이지... 그럼 그동안 갱도 일을 하며 지낸 거야? 여기엔 어쩌다 온 거고? 전쟁 때문에? 너 혹시 이 양키와 백인들의 전쟁에 끌려들어 간 건 아니겠지?"
엄한 누나의 채근에 이지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갱도에서 지내던 중 반역이 일어나면서 우린 모두 들고 나섰어. '자유는 누구에게나 평등하다'고 어느 흑인이 말하더군. 우린 그 이후로 행진하면서 사람들을 모았어. 전쟁에 나갔느냐고 하면 그러지는 못했어. 나에겐 처자식이 있어."
어느덧 끓어오른 주전자를 가져오던 맘미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백인의 아이건 흑인의 아이건 그녀에게 아이란 존재는 늘 특별하고 소중했다. 그녀가 분주하게 찻잔을 가져와 허브차를 타면서도 시선은 이지에 가 있었다. 그에게 더 이야기를 요구하는 표정이었다.
"아이 이름은 베티야. 이제 겨우 다섯 살이야. 전쟁이 일어나기 몇 년 전에 태어나서 그땐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버티는 중이지. 같이 데려와서 보여줬다면 좋았을 텐데."
"한참 예쁠 때네." 맘미가 말하며 찻잔을 내밀었다. 이지는 찻잔을 들고 조금씩 홀짝였다. 여전히 닦이지 않은 빗물이 그가 찻잔을 홀짝일 때마다 조금씩 나무 식탁에 떨어져 그대로 스며들었다.
"사실은 그래서 찾아왔어. 누나를 데려가려고." 이지의 말에 맘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와 함께 북부로 가자. 변변찮은 살림이지만 가족 하나 늘어난다고 문제 되지는 않아. 이 집안에 묶여서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을거야."
이지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맘미는 한 번도 그런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하라 일가의 사람이면 타라에서 나고 타라에서 죽는다'고 말했던 어머니의 말이 그녀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이지는 처음부터 그걸 깨트린 동생이었다. 타라에서 나긴 했으나 죽지도 않았고 도리어 맘미를 위해 다시 찾아온 존재였다. 맘미의 표정은 숙연해졌다. 그녀가 이 곳을 떠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한 번도 이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이지... 난..."
"오는 길에 알게 되었는데 며칠 뒤면 더 상황이 안 좋아질 거야. 몇몇 놈들이 군에서 빠져나와 약탈을 한다고 하는가 봐. 여기 인간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 없어. 나는 누나가 해를 입지 않았으면 하는 거 뿐이야."
"이지..." 맘미는 이지를 바라보았다. 어릴 적의 생기와 장난기를 모두 머금었지만 무엇보다 빛나는 의지가 그의 눈에 서려 있었다. 한 집안의 하녀에 불과했지만 오랜 세월을 그토록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의 입장에서도 북부의 삶은 또 다른 가능성의 땅이었다. 생각해본 적 없는 땅과 생각해본 적 없는 삶. 그러나 타라의 이 무겁고 어두운 저택과 그 안의 사람들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허영에 취해 애틀랜타로 떠나버린 스칼렛은 그나마 덜했지만 그녀 아래의 두 동생 수엘렌과 캐린은 내내 마음에 걸렸다. 더군다나 불과 어제 안주인이 돌아가셔서 몇 걸음 뒤 방에 그대로 누워있다. 주인마님인 제럴드는 차 한잔도 제대로 끓여 마실 정신이 아니다. 식량은 거의 떨어져 가고 있고 엉클 피터도 이 쓰러져가는 저택을 겨우 지탱하고 있다. 희망이라곤 없는 이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일궈온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그리고 이 희망 없는 절망 때문에 더욱 더 그들이 눈에 밟혔다.
상상 속에서 이 비를 뚫고 이지의 손을 잡고 나가 마차를 얻어타건 해서 북부로 떠나오면, 분명 조신한 그의 아내와 귀여운 딸 베티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티의 얼굴 속에서 과연, 그녀가 제 자식처럼 키워왔던 스칼렛과 수엘렌, 캐린의 얼굴을 찾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이나 남편도 없이 그저 어머니가 되는 연습만을 거듭해오던 그녀에게 있어 오하라 집안의 쓸쓸한 아가씨들은 좀처럼 두고 갈 수 없는, 그녀 발목을 죄고 있는 쇠스랑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떠나가면 그대로 폭삭 내려앉는 타라의 몰락한 저택이 폭풍우에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었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창문을 수없이 때리는 나뭇가지와 이파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이지..."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도 이젠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어. 이 곳에 이렇게 찾아와 준 것은 너무나 고맙지만... 그렇게 먼 길을 무턱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야. 전쟁이 나고 있는 곳을 이렇게 나이 든 흑인 여자가 얼마나 통과해 나갈 수 있겠어."
"누나, 그게 무슨 말이야. 이래 봬도 북부 사람들은 친절해. 누나는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여기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지 알지 못해."
"이지, 그 사람들이 정말로 너를 동료로 대해주니? 우리가 목화를 따고 재배하고 파종할 때 함께 했던 것처럼."
이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타들어 가는 불을 덮어둔 재만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다.
"누나... 정말 괜찮은 거야?"
"그래. 베티에게는 꼭 내 이야기를 전해줘."
"그래..." 이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베티도 분명 좋아할 거야."
"이지." 이내 문을 열려던 이지를 다시 맘미가 불러세웠다.
"다시는 타라에 오지 마. 타라를 잊어버려."
"누나..." 이지는 그 말에 말을 잇지 못하고 바라보다 이내 자신의 재킷에서 아까 전 낡은 금속통을 꺼내 그녀 손에 쥐여주었다.
"이지, 이건..."
"아무에게도 주지 말고, 누구에게도 보이지 말고 누나가 간직해줘. 불조차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잖아."
이지의 말에 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살아온 세월 동안 보아온 그 어떤 귀금속보다 단단해 보이는 것이 그녀의 투박한 손에 붙들려있었다.
이지는 그다음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빗속으로 들어갔다. 타라에 밀려온 거대한 태풍은 이지를 비롯한 모든 풍경을 그녀 눈앞에서 삼킬 듯 섞어버리며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어디가 어둠이고 어디가 빛인지, 어느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무저갱의 바람 속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맘미는 금속통을 꼭 쥐었다가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문을 닫았다. 그 약간의 틈마저 사라지자 타라의 모든 광경은 그저 어둠과 굉음으로 가득 차 버렸다.
태풍이 잠잠해졌을 때 즈음엔 이미 또 다른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다. 모두 식어버린 허브티를 앞에 두고 잠들었던 맘미는 별안간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덧 비는 모두 그쳐 있었고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분명 첫째 아가씨인 스칼렛의 목소리였다.
"케이티니...? 케이티 스칼렛..." 정신이 온전치 않은 제럴드도 자신의 딸만큼은 알아보았는지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리 딸 왔구나..."
맘미는 서둘러 영구불로 만들어 둔 재를 걷어 다시 장작 뭉텅이 하나에 불을 옮겨 붙이고는 쉽게 꺼지지 말라고 냄비 안에 밀어 넣었다. 간밤에 동생이 고급 라이터로 붙여준 불은 그 어떤 불보다 강하고 환하게 타올랐다. 그녀는 냄비를 쥐고 이내 반가운 마음과 어딘지 모를 허탈한 마음을 동시에 느껴가며 부엌을 나서서 현관 쪽으로 향했다.
제럴드의 품속에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첫째 아가씨 스칼렛이 보였다. 묘하게도 흙투성이인 그녀를 보니 떠난 동생의 발자취가 더욱 상기되었다. 그 느낌을 다 붙잡기도 전에 스칼렛이 아버지인 제럴드의 품에서 벗어나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눈물 어린 반가운 표정과 함께 그녀가 맘미를 향해 말했다.
"유모..."
아주 어릴 적, 그리고 다섯 살 즈음에, 더 커선 소녀가 되어, 그리고 불과 몇 달 전 애틀랜타로 떠나기 전 모습 그대로 몇 번이고 불려왔던 그 이름. 그녀는 마음속에서 조용히 허탈감을 내려두었다. 낯설지 않은 익숙한 감각으로 무던히도 자연스럽게.
"유모, 나 왔어."
그녀는 자연스럽게 맘미에게 안기며 울먹였다. 간밤에 젖은 이지의 등을 토닥이던 그녀의 두터운 손이 자연스레 가녀린 스칼렛의 등을 감싸주었다. 타오르는 불만이 이지의 기억을 되살리듯 주변을 밝게 비추며 덧없는 공간을 아늑함으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초조해 보이는 제럴드의 시선 속에서 맘미는 그녀의 포옹을 안아주며 속삭이듯 말해주었다.
"...가여운 아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