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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담 May 07. 2023

지상 최대 맥주 축제에서 건배

옥토버페스트에서 만난 사람들

파리에서 학교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 즈음되던 날, 뮌헨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학교 수업도 빠져가며 3박 4일 간 뮌헨에 머문 이유는 딱 하나였다.  3년 만에 열린 지상 최대의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어릴 적 세계 일주를 동경하던 시절, 여행 서적을 자주 읽곤 했는데 매번 세계 3대 축제로 자주 소개되던 축제다. 그때마다 그 현장 속 나를 그려보곤 했으므로 어른이 되어 이 축제로 향하는 여정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어른이 된 후 맥주를 좋아하게 되면서 흐름은 더 매끄러워졌다. 수년에 걸쳐 이어진 취향과 기호가 날 이곳으로 이끈 셈이다.


뮌헨중앙역에 도착하니 한국에서 연출과 배우로 연이 닿았던 J가 마중 나와 있었다. J는 내가 한국에서 아마추어 극단의 총연출로 활동했을 때 내 작품에 참여했던 배우 지망생이다. 그는 내가 파리에 가있는 동안 자신도 유럽 여행을 가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고 일정이 맞아 함께 옥토버페스트를 즐기기로 했다.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연습실에서만 보다가 또 어느 날엔 독일에서 만나게 되는 상황이 재밌게 느껴졌다.


바이에른 전통 의상인 ‘디른들’과 '레더호젠'을 입고 축제에 온 사람들
2주 동안 열리는 이 맥주 축제는 2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독일의 민속 축제다. 이곳에선 참가 권한을 지닌 6곳의 정통 양조회사, 아우구스티노, 하커-프쇼어, 호프브로이, 뢰벤브로이, 파울라너, 슈파텐의 맥주만 소비할 수 있다. 각 회사에선 옥토버페스트용 맥주를 별도로 주조하는데 알코올 농도가 5.8∼6.0%로 시중에 판매되는 맥주보다 도수가 높다. 한국으로 치면 '경주 한복판에서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막걸리를 마시며 판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축제'라고 할 수 있겠다.  


J와 내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파울라너의 비어 텐트였다. 중앙 무대에선 브라스 밴드가 축제용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텐트 안을 구경하다가 마주친 모든 이들이 눈을 맞춰주며 웃어줬다. 카메라를 들었다 하면 여러 명이 렌즈 앞으로 다가와 포즈를 취하거나 방해하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쳤다. 모두 그날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단지 이곳에서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오래된 친구처럼 굴었다. 흥이 오른 사람들은 맥주잔을 들고 의자 위로 올라가 자신만의 리듬으로 춤을 췄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건배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세상에 슬픔이 단 한 줄도 쓰이지 않은 곳이 있다면 바로 여기일거라고 생각했다.


텐트마다 흘러나오는 음악이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다르다. 뢰벤브로이 텐트는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였고, 가장 활기찬 곳은 파울라너 텐트였다.

중앙 무대 바로 아래엔 술잔을 내려놓고 춤을 추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었다. 바이에른 전통 춤을 추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이내 나를 휙 하고 끌어들이더니 다른 손을 내밀며 춤을 권했다. 한국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은 아니었으므로 잠깐 머뭇거리는 찰나에 그는 냅다 나를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그가 능숙하게 다음 동작으로 이끈 덕분에 꽤 그럴싸한 모양새로 춤을 출 수 있었다. 내 의지로 행한 움직임은 거의 없었으나 그렇게 춤이라는 것을 추고 나니 기분이 놀라울 만큼 좋아졌다. 노래가 끝나고 다정히 내 손에 입을 맞추는 그의 감사 인사에 나도 고개를 꾸벅이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들의 자유분방함이 마냥 술기운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닐 테다. 유럽 땅에서 그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나도 모르게 타인의 시선을 배제하고 좀 더 멋대로 굴어보게 됐다.)


텐트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온 나와 J는 금세 축제의 에너지에 압도되었다. 이따금 자신이 포착한 즐거움을 기록해 두고자 카메라를 들었다. 그와 내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달랐다. 그는 한 장을 찍어도 신중히 찍는 사람이었고, 나는 좋았던 것을 최대한 담아두려 하는 사람이기에 더 그랬다. 텐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를 잡고 시선을 이곳저곳으로 옮겨가며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의 웃음을 보고 있는 게 좋았다. 그 공간을 너무 유심히 감각하고 있던 탓에 차오르던 감정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있었다.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애 처음 경험하는 범주의 기쁨에 내 몸은 눈물로 반응했다. 내가 너무 붕 떠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옆에 서있던 J의 얼굴을 봤는데 그도 나 못지않게 감동을 받은 듯했다. 타인의 즐거움을 진득하게 목격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일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정겹고도 따뜻한 광경에 우리는 한참 동안 어쩔 줄을 몰라했다. 새삼 왜 인류가 꾸준히 축제의 역사를 써내려 왔는지 알 것만 같았다. 행복은 실로 전염되는 것이었다.

옥토버페스트의 분위기를 단번에 느낄 수 있는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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