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에서 만난 어느 민족 이야기
모로코 여행 2일 차, 우리는 마라케시를 떠나 메르주가로 향했다. 74명의 외국인들과 1명의 한국인을 태운 8대의 리무진이 새벽 공기를 가로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험난한 아틀라스 산맥을 타고 한참을 이동해야 했다. 인터넷도 터지지 않는 차 안에서 지난한 시간의 지루함을 달래준 건 창 밖의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너른 땅과 이국적인 건물들, 처음 보는 종류의 식물들이 차창 프레임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잠깐 잠에 들었다가 덜컹거리는 소리와 덩달아 느껴지는 진동에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까마득한 절벽과 거대한 협곡이 보였다. 그간 내가 감각했던 지구에서는 전혀 볼 수 없던 이색적인 풍광이었다. 운전기사는 굽이가 심한 절벽 위 도로에서도 거침없이 커브를 돌았다. 급회전하는 구간마다 고장 난 안전벨트를 붙잡고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이윽고 줄지어 달리던 리무진들이 하나둘 속도를 줄이더니 도롯가에 정차했다. 산간도로 끝자락에 기념품을 늘어놓고 파는 난전이 보였다. 한 부자가 그 앞에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조각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그들을 '베르베르인'이라고 소개했다. 우리가 오는 길에 마주했던 협곡 곳곳의 작은 마을들도 베르베르인의 거주지라고 했다.
베르베르인은 북아프리카에서 거주하던 여러 민족들의 후예로 마그레브(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 북서부 아프리카 지역)의 토착민이다. 이들은 다원적인 모로코 사회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낯설게 느껴졌던 이유는 그간 북아프리카를 단순히 아랍•이슬람 문화권이라고 인식해 왔기 때문일 테다. 그들의 존재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이어지는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쫑긋 세웠다.
수세기 전, 이 땅의 주인은 베르베르인이었다. 그러나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 거주하던 아랍인들이 북아프리카로 세력을 확장했고, 그 과정에서 북아프리카의 이슬람화와 아랍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마그레브 일대의 패권을 두고 아랍인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베르베르인은 결국 기존의 토착 신앙을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해야 했다. 그리고 이슬람교를 내세워 모로코의 정체성을 규정한 왕조의 통치 방식에 의해 베르베르 문화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프랑스의 식민지배 이후 '탈식민화' 정책에서 이러한 흐름이 한번 더 나타나기도 했다. 이웃나라 알제리는 자국 내 프랑스 문화와 프랑스어를 말살하기 위해 아랍•이슬람화 정책을 강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토착어인 베르베르어와 베르베르인의 문화까지 배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르베르인들은 자신의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중앙 권력이 장악하지 못한 국토에서 자신의 고유한 생활방식과 문화를 계승해 왔다. 18세기 후반에는 해외 각지로 떠났던 생계형 이민자들이 자국에서 베르베르인으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활발하게 연대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들의 언어와 문화는 마그레브 일대 곳곳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특히, 언어의 경우 현재 모로코인의 40%가 베르베르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북아프리카 지역은 여러 이민자의 침략에 의해 다양한 언어 및 문화의 교차와 혼성이 발생한 곳이다. 그리고 이곳이 끝까지 다양성을 품는 지역으로 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베르베르인처럼 자신의 문화적 독자성을 지키고자 한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실제로 베르베르인은 자신을 '아랍인'이 아닌 '베르베르인'이라고 소개하며, 자신이 베르베르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단일 민족 국가가 익숙한 나에겐 ‘디아스포라’의 역사 속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가 무척 인상 깊었다. 프랑스로 돌아가자마자 (나는 당시 교환학생으로 파리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던 모로코인 친구에게 연락했다. 모로코 여행을 하면서 베르베르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고 흥미로웠다는 말을 전하자 그는 자신도 '베르베르인'이라고 소개했다. 그 순간, 내 모로코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 계속될수록, 북아프리카 하면 떠오르던 획일화되고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하나씩 깨어지고 있었다. 나의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던 이 나라의 다채로움과 역동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장 전날에 머물렀던 마라케시에선 아랍•이슬람 문화를 진득하게 느낄 수 있었고, 아틀라스 산맥에선 베르베르인의 전통 가옥과 그들의 삶을 훔쳐볼 수 있었다. 우리를 태운 리무진은 다시 메르주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따금 차도에 근접한 베르베르인의 마을을 지나갈 때면 한창 외출 중인 베르베르인을 차창 너머로 볼 수 있었다. 강렬한 햇빛 아래에 천천히 걷고 있는 그들의 무미건조한 표정이 왜인지 다정하게 느껴졌다. 간혹 그들 중 일부는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곤 했다. 이 세상은 어째서 이토록 다양하고 다정한 것들로 들어차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