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의 오아시스 마을과 요새 도시
그 어떤 생명체도 품지 못하던 불모지에 물 한 줄기가 흐른다. 해발 4천 미터에 달하는 아틀라스 산맥의 빙하가 녹으면서 생긴 빙하수가 바로 그것이다. 물줄기가 흘러간 자리는 이내 초록빛으로 물든다. 척박했던 땅에 풀과 나무가 자라고 생명체가 하나둘씩 자리를 잡는다. 그곳엔 당연히 인간도 있다. 누구도 찾지 않던 땅에 생명을 불어넣은 이 위대한 물줄기는 마을을 만들어내더니 이내 문명을 가능케 한다. 그렇게 이 지구에 또 하나의 특별한 ‘세상’이 생긴다.
모로코 여행 3일 차, 우리는 모로코 남부의 끝자락에 위치한 사하라 사막으로 향했다. 장장 10시간 동안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거리였다. 74명의 외국인 학생들과 함께 하는 패키지여행이었는데, 나는 그중 단 1명의 아시아인이자 한국인이었다. 리무진 안을 가득 채운 외국어를 자장가 삼아 잠에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차창 너머 아틀라스 산맥의 다채로운 자연경관이 지루함을 달래주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을까. 눈을 의심케 하는 푸른 숲이 계곡 사이로 보였다. 그 주변에는 붉은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이 정경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며 운전기사가 차를 멈춰 세웠다.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둘러봤다. 나와 같은 리무진에 탔던 독일인 친구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말했다. 여기가 오아시스 마을이래. 내가 풍경을 감상하는 데 정신이 팔렸던 사이에 가이드가 이곳에 대해 설명해 준 모양이었다. 오아시스 마을, 오랫동안 궁금해했던 곳이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서 느낀 감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동안 오아시스하면 떠올렸던 허구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서 그랬을 테다. 좀 더 열악한 환경에서 극적으로 마주해야만 할 것 같았다. 오아시스란 원체 그런 것이었으니까. 한편으로는 툰드라 협곡에서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물줄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게 됐다. 새침하게 흘러가던 가느다란 물길이 이렇게 거대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모로코의 자연경관은 늘 이런 경외심을 느끼게 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너른 암석 사막 위에 우뚝 솟아있는 마을, ‘아이트 벤 하두’였다. 흙을 높게 쌓아 올려 지은 건물들이 모여있는 거주지를 ‘크사르’라고 부르는데, 아이트 벤 하두는 모로코의 크사르 중에서도 가장 우수하고 독특한 사례로 꼽히는 곳이다. 모로코 계곡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이곳은 원시 사하라 인이 흙을 이용한 건축에 얼마나 능했는지 보여준다.
쩍쩍 갈라져 있는 메마른 토지를 밟으며 마을의 입구를 향해 걸었다. ‘요새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마을 전체가 방어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과거에 유목민들은 열악한 자연조건 속에서 한정적인 자원을 두고 걸핏하면 전쟁을 치러야 했다. 두꺼운 벽과 작은 창문, 진흙으로 높게 쌓아 올린 건물, 폐쇄적이고 복잡한 마을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마라케시에서 메르주가의 중간에 위치한 이곳은 오랜 시간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천년 전, 사막으로 향하던 수많은 대상들이 이곳에서 쉬어갔다고 한다. 지금은 텅텅 비어있는 이 마을이 과거에 누렸을 번영과 영광에 대해 생각해 보니 아득했다. 얼마나 길고 지난한 시간이었을지, 동시에 얼마나 경이롭고 귀한 순간들이었을지.
가이드는 아직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너무 후미진 골목으로는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정작 이곳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우리를 마을 깊숙한 곳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특히 자신들이 살고 있는 전통 가옥의 내부를 보여주겠다는 제안은 정말 솔깃했다. 몇몇 친구들이 그를 따라가는 걸 보고 나도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오스트리아인 친구가 나를 불러 세웠다. “너 거기 따라가면 돈 내야 하는 거 알지? 괜찮아?” 그 말이 예상치 못한 지출은 경계부터 하고 보던 가난한 대학생의 두발을 붙들었다. 생각해 보니 공짜일 리 없었다. 이곳에선 언제 어떤 것에 돈을 내게 될지 모른다는 친구의 말에 동의했다. 마라케시의 메디나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이탈리아인 친구가 내야 했던 돈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 ‘여행자’로서 단단히 각성된 상태였던 게 분명하다.
마을의 정상에 도착하니 시선이 막힘 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이곳이 왜 요새였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꼭 바다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곳의 바다는 붉었다. 이글거렸으며 고요했다. 아이트 벤 하두는 그 위에 덩그러니 놓인 섬 같았다. 모로코에서 본 수많은 건축물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곳이었다. 무신론자인 나는 화려하게 꾸며진 종교 건물보다 자연과 어우러져 투박하게 놓여있는 건물에 더 많은 애정을 느끼곤 했다. 인간이 이토록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갔다는 사실은 묘한 감동을 줬다. 가끔은 풍경 그 자체가 하나의 위로가 되어 다가오기도 한다. 계속해서 이렇게 낯설고도 경이로운 세계에 가닿기를 바랐다. 다음 행선지는 사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