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초마다 세우는 계획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수첩 하나 쓰기이다. 일기, 아이디어, 단상 뭐든 써서 작은 수첩을 하나 채워보자 하는 마음이지만, 그러나 계획을 완수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야심 차게 몰스킨 수첩에 각인까지 하지만 어떤 수첩은 3-4년 동안 다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늘 가지고 다닌다.
수첩 쓰기가 어려운 것은 기록을 저장하는 매체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로는 ‘쓴다’는 행위가 ‘친다’라든가 ‘보낸다’라는 가의 개념으로 바뀌어 버렸고, 쓴다라는 방법 외에도 녹음을 한다거나, 사진, 영상을 찍어 즉석에서 편집하는 일이 너무도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멈춰 서서 수첩을 꺼내어 직접 쓰는 것은 비효율적인 방법이 되어버린 느낌도 있다.
그러나 수년동안 수첩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종이와 펜으로 만들어낸 기록에는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집이나 도서관 책상이나, 카페의 테이블, 공원 벤치에서 몸을 우그려 쓰는 기록에는 날 것의 생각, 감정이 금방 쏟아져 내린 듯하고, 쓴 글씨를 떨어져서 보면 하나의 이미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손으로 쓴 기록은 개발자들의 프레임을 통과하지 않은 그대로의 나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손으로 쓰는 기록이야 말로 그렇게 나적인 나인 것이다.
‘기록하는 삶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매체를 따지지 않고, 무엇이든 기록하는 행위야 말로 삶의 지탱하는 힘이 된다는 의미로 말했겠지만, 나에게 이 문장은, 어차피 안 쓸건대 이제 그만하자, 쓰지도 않은 수첩을 뭐 하러 자꾸 사들여! 하는 생각을 들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이 수첩 한 권으로 연대기로 꽉 채워보자라는 의지를 다시 불태우는데 힘을 준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에는 대답이 어려울지 몰라도, 하루, 하루를 살며 삶을 겪어낸 나의 작은 문장들은 이 우주적 담론에 대한 힌트를 주기 때문이다.
올해는 작년에 다 채우지 못한 수첩을 이어서 채워나갈 예정이다. 내년에는 반드시 새로운 수첩에 새로운 각인을 해서 나의 연대기를 풍성하게 채워 넣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