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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백 Sep 04. 2024

펫로스 증후군

나의 강아지가 죽었다


눈으로도 쇠약해지는 게 보이는 일주일 동안 나는 4킬로가 빠졌고 씹어먹는 것은 아무것도 맛있게 먹을 수가 없었다. 그 좋아하는 커피도 반쯤 마시면 더는 먹히지 않아 다 버렸고 고기류는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았다. 과즙이라도 먹어야 하는데 싶었지만 사과를 잘라 놓으면 한 조각의 반도 씹히지 않았다.

내 새끼가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를 못하니.


잘 보내줘야 하고 약값도 벌어야 하니 정신 차리려고 아침과 저녁에 액체 영양제 하나씩 먹고 밀크초콜릿을 녹여서 하나 먹었다. 밤 늦게 작은 초코칩 쿠키를 조금씩 녹이듯이 씹어 먹고 중간에 두유 하나 먹으며 버텼다. 하루에 500~800칼로리쯤 먹었나 싶다. 그것도 억지로 먹었다. 모든 약속을 취소.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이 아이를 보낼 자신이 없었다.

내 20대와 30대를 같이 보낸 녀석인데

이 따뜻하고 몽클거리고 헥헥거리는 털뭉치를 어떻게 하루도 안지 않고 살아갈 수 있나.


나는 이 경험에서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을 이해하게 됐다. 이전에는 도대체 왜 저러나?저게 뭐라고. 살 사람은 살아야지! 쉽게 말했던 유형.

1.죽은 존재를 따라 죽는 사람.

2.불싸지르거나 차량돌진하는 사람.

하면 안되는 일이지만, 그 정서와 심리가 완전히 이해가 됐다는 말이다.

마지막 며칠간은 정말 따라 죽지 않고서는 이걸 버틸 수가, 이 슬픔과 절망을 극복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따라가지 않을 거면 나를 혹사시키고 괴롭히고 싶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데 아무 곳으로나 마구 밟아서 산산조각 나버리고 싶었다.


나는 혼자 살아도 외롭다고 느낀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혼자 살아서 자유롭고 좋았는데,

갑자기 남은 생을 혼자 살 자신이 없어졌다.

6남매쯤을 낳고 싶어졌다. 한시도 고요할 틈이 없는 복작거리는 가정을 이루고 싶어졌다.

이 생각을 오래 가지고 있지는 않겠지만.


라디오를 아무리 크게 틀어도 허전했다.

소리를 빡 빡 지르며 운전했다. 그러다 울었다.

많이 울어야 한다.

소리내어 아주 서럽게 울어야 한다.

그러면 조금은 나아진다.


숨막히게 슬퍼서 휴대용 산소통을 샀다.

가슴이 답답할 때 산소를 마셨다.

그러면 마시는 동안 심호흡을 할 수 있게 되어

도움이 된다.


긍정적인 말을 읽어주는 유튜브를 틀고 자기 전에 속으로 그 말을 한 문장씩 따라 읽었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게 오로지 그 말들만이 법인 것처럼 속으로 따라 읽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 죽음을 키워드로 한 에피소드들을 모두 골라 반복해서 들었다.


ㅡ그게 다 애착이고 집착이다. 죽는 것은 순리이다. 끊어내라.


이 말이 현실적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

아, 이 마음은 집착이구나.

내가 오래 가지고 있는 물건을 잃을 때 마음이 허전한 것처럼 어떤 것이든, 그것이 존재일수록 더  하게, 애착이 형성되어서


그 마음을 비우는 게 이토록 힘든 거구나.


잘 가라. 이것이 순리다. 만났으면 떠나는 것이다.


얻는 것은 잃는 것이다. 내가 가지는 것이 많을수록 잃는 것도 많은 것이다.

많이 사랑하면

많이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이 역설을 받아들였다.


평화롭게 눈을 감은 모습이 위안이 되었다.

고통이 오래 가지 않는 것이 이 아이에게 좋은 것이다. 오래 잡아두고 싶은 것은 나의 욕심이고 집착이다.


생각을 정리했다.


같이 놀러다니고 충분히 사랑해주면서 많은 추억을  쌓았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행복하고 충만하고 즐거운 인연이었고 견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보내고 난 후

어두운 집이 너무 싫고 장난감도 못 보겠어서

불을 환하게 켜고 장난감을 버렸다.

하나만 남겨두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지는 않아서.


창문을 죄다 열고

선풍기를 최강으로 틀고 옷을 다 벗고 잤다.

식은땀이 흐르는데 몸에는 열이 나고

머리가 쉬지 않았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숨을 몰아쉬었다. 깊은 한숨을 아무리 쉬어도 답답했다.

찬물을 미친듯이 마셔도 가슴이 후련해지지 않았다.

이러다 공황발작이 생기는 건가,

하면서 다시 산소를 들이키며 호흡을 골랐다.


정신과를 가야 하나. 상담을 잡아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이 녀석을 모르는 전문가들과 상담하고 싶지 않았다. 부재의 슬픔과 고통은 보편적인 거지만 이 녀석과 나의 사이는 내 것이니까.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이 이 부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밤에 지치도록 걸으면서 사람 소리가 많은 방송을, 많이 웃는 소리가 나는 방송만을 보고 들었다.


괜찮다, 나는 앞으로 나아갈 거야, 이걸 딛고 좋아질 거야.


소리내어 말했다.


낮에 햇볕 아래서 몸을 불태우듯이 걸었다.


햇살이 정말, 큰 도움이 된다.

유기견봉사도 큰 도움이 된다.

고양이 카페, 강아지 카페 가서 위로를 받고 오라.

오픈채팅에 반려동물을 잃은 사람들의 모임도 있다. 나는 거기에서 계속 슬픔을 복기하지 않으려고 들어가지 않았다. 슬픔에 휩싸이면 슬픈 영화를 계속 보는 것 같아서.


녀석의 이름만 입으로 말해도 눈물이 나고

가만히 있다가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서

카페나 공원에서 눈물을 숨기기 바빴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번씩 울컥 오열하는 순간이 오지만

산책하는 강아지들을 보면서

저 주인은 저 아이를 어떻게 보낼까, 가슴 아플 일만 남았구나 하고 슬퍼하지만,


괜찮아진다.

집착이 가슴속에서 빠져나가는 속도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건 사랑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나아진다.

오늘보다 내일 약간씩 덜 슬퍼진다.

내일보다 모레, 덜 아파진다.


그걸 믿고

견뎌 본다.


당신도 나아질 것이다.

괜찮아질 것이다.


이것은 극복할 수 있는 슬픔이고 고통이다.





#반려견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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