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는 드시나요?’
회식을 앞두고 인사관리부 부장님이 메뉴 고르는 중이셨는지 메신저로 물어보셨다.
나는 못 먹는다고, 그런데 (채식 메뉴가 없을 테니) 해산물 들어간 국물이나 요리에서 다른 건더기는 건져먹겠다고, 그렇지만 살점은 못 먹는다고 대답했다.
'아.. 그럼 어디 가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채식하는 사람이 없어도, 원래 회식 장소는 고르기 어렵다. 나 때문에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내가 비건 지향을 하는 것은 주위에 미안해할 일이 아니지만, 아무튼 일을 어렵게 만든 것에 대해 눈치가 보여서, 인사관리부 부장님 자리에 들렀다.
그의 노고를 덜기 위해 나는 횟집에 가면 매운탕 국물이랑 채소 건져먹을 수 있고 밥이랑 김, 술만 있어도 괜찮다, 고깃집 가도 밥이랑 된장찌개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에이 어떻게 그런 걸 먹여, 회식인데’였다. 나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이 감사하지만, 나는 회식장소가 어쩔 수 없이 다 고기나 회 베이스라서 어쩔 수 없고, 정말 괜찮다고 말했다.
계속 맘에 걸려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럼 혹시 중식은 어떠시냐고 물었다. 중식이면 뭐 먹을 수 있냐는 질문에, 요리 종류 중에 채소나 두부가 메인인 것은 다 가능하다고 답했다. 예를 들면 가지튀김이나 마파두부는 대부분 먹을 수 있고, 간짜장도 고기 빼고 시키면 먹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아 그런데 대표님이 중식은 싫어하시지, 참. 쉽지 않았다. 이전에 몇 번 갔던 곳을 제안드렸다.
"전집이나 한식집은 어떠세요? 파전 같은 거 먹을 수 있어요.”
"거기 너무 많이 가서 질려~"
나도 사실 늘 비슷한 메뉴에 질린다. 비건들끼리 술 마시러 다닐 때는 안 질리고 다양한 메뉴로 잘 먹고 다니는데 말이다. 그런데 회사에서 나도 그 메뉴 질린다고 말할 수 없다. 이미 나 때문에 메뉴가 제한된 거니까. 계속 모니터를 보며 '어딜 가야 하냐'고 고민하는 그에게 나는 죄송해졌다.
“저 때문에 메뉴 고르기 어려우시죠...? 전 진짜 밥이랑 술만 있어도 괜찮아요!"
그러자, 부장님이 농담조로 말했다.
‘아오. 확~ 눈 가리고 입에 고기 넣어버릴까 보다~’
순간 말문이 막혔고, 귀를 의심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아, 그래. 농담이지. 악의 없이 답답함에 나온 농담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당황했다. 신입 때였으면 아무 말도 못 했을 걸, 연차가 쌓여서인지 '이 말을 듣고 아무 대답 없이 넘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 다음에 또 이 조직에서 일할 다른 채식 지향인을 위해서라도.
‘에이... 아무리 입에 넣으셔도 진짜 못 먹어요. 저 이제 못 씹겠어요’ 하고 말았다.
농담인 걸 알고, 악의가 없이, 회식 장소 고르기 까다로워서 그런 것도 알지만…
진짜, 이런 말을 들으면서까지, 회사에 다시 다녀야 하나, 고민이 잠깐 들었다.
내가 왜 비건을 지향하는지 몰라서 그런 것이겠지.
동물의 살점을 먹는다는 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서 그런 것이겠지.
그렇지만... 비건이 소수고, 논비건이 다수니까 비건은 이런 농담을 웃어넘기면서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걸까?
집에 오는 길에, 개를 기르고 개를 먹지 않는 이에게 ‘확 눈 가리고 입에 개고기 넣어버릴까 보다’ 하면 얼마나 폭력적이었을까, 상상해 보았다.
더 슬픈 건, 그분이 특별하게 못 된 성격도 아니고, 안티 비건도 아니라는 거다.
“집에 가서 몰래 치킨 먹는 거 아니냐”라고 물었던 협력사 대표님의 질문에서는 의심과 악의가 묻어있었던 데 비해, 이번에 들은 “확 눈 가리고 입에 고기 넣어버릴까 보다”는 농담에는 그 정도의 악의조차 없었다.
정말 그냥 ‘혼자 유난하게 고기도 해산물도 우유와 계란까지도 먹지 않아서, 회식 장소 찾는 걸 어렵게 만드는 직원’ 때문에, 함께 먹을 수 있는 회식장소를 찾는 게 질리고 어려운 거다.
비건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를 탓할 수 없고, 비건이면서 굳이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나 자신도 탓할 수 없다.
그가 나쁜 게 아니라, 상황이 나쁘다.
개인의 탓이 아니라, 육식중심주의 사회 탓이다.
그 사회를 바꾸고 싶어 탈육식을 하는 내 존재가 균열의 원인이다. 균열이 평화롭기만 할 수는 없다.
만약에
채식 메뉴가 같이 준비되어 있는 회식 장소가 강남에 몇 군데라도 있었더라면,
대표님이 중식이나 태국요리를 좋아해서 채식 옵션이 가능한 요릿집도 좋아하셨더라면,
직원 중에 절반 정도가 이미 채식을 하고 있었더라면,
직원 중에 채식하는 인원은 적더라도 대표나 임원이 채식을 하는 상황이었더라면,
위 상황 중 한 가지만 충족되었어도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회사 전체에서 혼자 비건인 직장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언제든 남을 불편하고 힘들게 만들고, 배제되고 소외되는 걸 감안하고 지내야 하는 걸까? 나만 회식에서 빠지겠다고 하면, 모든 게 편해질까? 이런 자리마다 피할 거였다면, 회사생활도 안 했을 거다.
다른 비건 직장인들의 이야기와 나의 지난 회식들도 떠올랐다. 동료들이 비건인 자신을 빼고 회식했다는 이야기, 고깃집에 따라가서 밥과 상추와 된장만 먹은 이야기, 회사를 다니는 중에는 채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그리고 환경단체에서 팀회식 메뉴를 처음으로 올 비건으로 하려다가 '선택의 자유'를 박탈하는 거라며 반대에 부딪혔던 이야기까지.
비건은 입맛이나 취향이 아니라, 신념이자 태도다.
비거니즘은 '동물에 대한 착취를 거부하는 철학이자 삶의 방식'을 뜻한다. 동물을 가두고 착취하고 죽여서 얻은 그 어떤 것도 소비하지 않겠다는 불매운동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횟집이나 고깃집에 따라가서 앉아있는 것 자체도 동물성 식품을 공동으로 소비하는 것이니 마음이 편한 것만도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가면 나를 위해 최대한 채식 옵션으로 주문하는 순간이 있다.
폭력에 반대하고, 해방과 평등을 바라는 것, 그걸 위해 일상에서 비폭력을 실천하는 것, 이런 태도 자체가 직장생활과 병행하기 쉽지가 않다는 것이라는 아픈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다.
이런 고민들을 안고, 나는 회식날을 기다린다.
조금 외로우니까 유명 비건 밈으로 마무리해보겠다.
비건 맨날 나 혼자야 흑흑 lonely... 동물이 고통받는 게 싫은 내가 이상하다는 이 세상이 나는 이상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