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회사 회식 자리에서 남성 기혼자인 선배가 유명 페미니스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 나랑 전에 일했는데, 지금이랑 완전 달라서 못 알아봤잖아. 지금은 무슨 걸크러쉬? 페미니즘? 근데 원래 그렇게 숏컷도 아니었고, 매일매일 화장하고 남자한테 관심도 되게 많았어~”
당시 숏컷이었던 나는 그가 굳이 내 앞에서 저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 의도를 가늠하는 것보다 더 흥미로운 생각들이 내 안에 솟아났다.
‘와, 나도 뒤에서 저런 말을 듣고 있지 않을까? 지금은 페미지만, 예전엔(?) 남자 엄청 좋아했다고... 근데 그게 그렇게 모순적인 일인가? ‘남자 좋아하는 페미니스트’로 살면 좀 안 되는 걸까?’
페미니즘 콘텐츠에 자주 등장해 온 어떤 그림이 떠올랐다. 남성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아름답게 꾸미면서 자기만족이라 믿고,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폭력에 노출되고, 가부장제에서 기대하는 여성의 역할을 해내는 여성들. 그리고 그 억압의 고리를 끊어내는 방법은 뭘까, 고민하고 행동하는 페미니스트들. 자신의 권리를 챙기지 못하는 답답한 ‘여성’과 그들의 계몽을 돕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라는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는 페미니즘 콘텐츠에 자주 등장해 왔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온라인상에서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이해하거나 오해하는 틀로 기능해오기도 했다.
이는 한 개인의 과거와 현재로 그려지기도 하고, 남성의 편을 드는 ‘흉자’(흉내자지)와 여성의 편에 선 ‘메갈’(메갈리안) 세력의 대치를 설명할 때 활용되기도 하며, 폭력의 피해자와 상담가의 구도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현실에서 이 둘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에게 어떤 역할이 기대되고 어떤 편견이 씌워지든, 개인은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인간이다. 나 역시 그렇다.
내 SNS 계정을 오래 팔로우해 온 지인들에게 나는 흉자이자 메갈이고, 방관자이자 액티비스트일 것이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 앞뒤 다른 정체성, 대체 무슨 말일까? 싶겠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페미니스트라면 조금씩 공감하지 않을까. 20대 초반에는 맨날 다이어트하고 ‘연애중’을 올려대는 금사빠였다가, 페미니즘 리부트 후에는 탈코르셋을 전시하면서 4B(남성에 대한 비연애, 비섹스, 비혼, 비출산 운동)를 지지하는가 싶더니 (고백하자면, 사실 그때도 계속 헤테로 연애를 했다. 부끄러워서 올리지 못했을 뿐...) 비건을 시작한 후에는 리버럴 페미니스트가 되어서 갑자기 틴더남 썰을 풀다가, 요즘 또다시 슬슬 코르셋과 연애를 전시하는, 그러면서도 계속 사회적인 이슈와 홍보거리를 함께 공유하는… 복잡한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코르셋을 벗고 싶지만 동시에 욕망당하고 싶고, 자본주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자본을 얻기 위해 내가 가진 자원을 총동원하며, 동물해방을 꿈꾸지만 나의 해방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지 아직도 찾아가는 중이다. 총체적 난국처럼 보이는 복잡한 정체성과 고민을 끌어안고 생존하고 있는 와중에, ‘남성을 욕망하고, 남성에게 욕망당하고 싶은 여성’이자, ‘여성의 평등한 권리와 해방을 부르짖는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언제나 나 자신과 불화한다.
그만큼 페미니스트가 ‘섹슈얼리티’에 대해 글 쓰고 말하는 것은 정말이지 까다로운 일이다. ‘남미새’(남자의 미친 새ㅇ라는 은어)는 조롱이 되고, ‘페미’(페미니스트)는 낙인이 되는 세상이다. 그런데 남미새 페미라니. ‘이런 글을 써도 되나?’ 자기 검열에 빠졌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결국엔 나만 비난과 위험에 노출되고, 페미니즘이 조롱거리가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을 피할 수 없다. 이 글은 아마 페미니즘을 헐뜯고 싶어 하는 남성들에게도, 자신의 인생에서 남성을 성공적으로 없애버린 멋진 페미니스트들에게도, 그리고 여성이란 조신하게 혼전순결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어르신들에게도 모두 비판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시도해보려 한다.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내 행복을 찾아’* 관계 맺고 살아가기 위해, 내 욕망의 구슬조각을 모으기로 했다.** '남미새'이면서 '페미니스트'이고, '안정'과 '자유'를 동시에 꿈꾸며, ‘내 안의 빻은 섹슈얼리티’와 ‘PC해야 한다는 압박’ 사이에서 조각난 채로 숨어있는 깊고 솔직한 욕망들을 찾아 마주할 테다. 욕망의 구슬을 완성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그 모험 속에서 어떤 빻은 요괴를 마주할지 알 수 없지만, 모든 모험이 그러하듯 좋은 동료를 만날 수도 있다고 기대한다. 나처럼 자신의 욕망을 숨기면서 스스로를 지나치게 비판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각자의 욕망을 긍정할 수 있길 바라며, '남미새 페미' 시리즈를 시작한다.
*유명한 <이누야샤> 가영이 밈, 퇴사 짤로 주로 활용된다.
**만화 <이누야샤>에서 가영이는 사혼의 구슬조각을 모은다. 그 구슬의 위치는 가영이만이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