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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패딩

겨울의 외투, 겨울의 적토마.

by 마음돌봄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외투>에는 '아카키'라는 하급 공무원이 주인공이다.

있는 듯 없는 듯 퍼즐 한 조각처럼 있는 그.

눈에 띄지 않아 사실상 직장에서 무시받는 그는 어쩌면 너무도 조용한 존재.

길가에 흔히 피는 꽃과 같은 존재다.

애써 아닌 척 하지만 동료들의 무관심 속에 늘 외롭고 소외감을 느낀다.

지금이야 MBTI뒤에 숨어 내 성향은 인프피야 라고 말이라도 할 수 있지만 당시엔 그저 자발적 타의적 아싸였을뿐. 러시아의 추운 겨울 낡은 외투로 일관하던 그는 새 외투가 필요함을 느끼고 저축을 해서 온 힘을 다해 새 외투를 장만한다. 새 외투는 그에게 히어로들의 슈트처럼 자신감과 만족감을 주고 한껏 고양된 기분으로 지내다 어느 날 외투를 그만 도난당하고 만다. 여기저기 찾으려 노력하고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만 전혀 아무런 도움도 지지도 받지 못하던 그는 그만 극심한 스트레스와 건강 악화로 사망에 이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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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문학동네 / 민음사



당시 러시아의 사회를 비판하며 인간 개인이 갖는 고독과 고통을 조명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 소설은 작가 특유의 블랙코미디도 느껴지는 이야기다. 외투 하나로 자신이 달라졌다 생각하는 모습은 요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새 옷은 희한하게도 눈에 띄기 마련이다. 작은 스웨터 하나도 새 옷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새로운 곳, 새로운 신발, 새 옷. 새것이 주는 잔잔한 희망과 기쁨이 분명 존재한다. 하나 새것의 '새로움'이 사라졌을 때의 익숙함도 오롯이 인간들의 몫이다. 문학동네의 작품 표지는 아카키가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투를 입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고, 민음사의 표지는 댄디한 외투 위에 엔젤링처럼 보이는 것이 그려져 있어 주인공의 운명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외투란 겉옷이다. 겉옷은 껍질이다. 겉가죽에 매몰되지 않는 순간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 그 모습이 수수하게 보일지 촌스럽게 보일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사실 안다. 어울리는 착장을 한 인물이 얼마나 당당하고 아름다운지 우리는 알고 있다.

단, 나와 어울렸을 때를 전제로 한다. 걱정 말지어다. 외투는 많으니까.





<나의 외투, 롱패딩>


너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바람이 정면으로 맞닥뜨려오는 신안의 어느 바다에서도

눈 쌓인 해변 앞 편의점 앞에서도 나는 너를 입고 그렇게 내달렸다.

다리까지 감싸지 않으면 나가기조차 싫던 겨울.

적어도 엉덩이는 가려줘야 이 계절을 보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너와 함께한 계절은 몇 번을 반복했고 다 낡아버린 너는 이제 사라졌다.

눈이 하염없이 내려도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뺨을 적셔도

숏패딩으로 버틴 겨울.

자발적 얼죽코가 되어

코트를 입고 머플러를 칭칭 감던 몇 년의 겨울



어느 순간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 의상

특별한 이벤트에만 펼쳐지는 쇼핑몰

때에 맞춰 옷을 사지 않아도

유행을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지금

나에게 맞는 알맞은 옷을 알게 된 오늘날이 더 좋다.



그래도

겨울엔

롱패딩이야.



아카키, 주인공이여.

외투에 매몰되지 마세요.

저축은 또 하면 됩니다.

자신의 가치를 겉옷으로 판단하지 마세요.

당신은 소설 속 주인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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