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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필 Aug 10. 2022

#12 종로에서 시인과 함께 3

내가 좋아하는 것(3) 종로



 이번 여행의 목적은 '서촌 탐방'이었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리가. 마침 광화문 근처에 저녁 약속이 있었고, 인사동에 꼭 들러야 했기에 첫날 여행은 서촌 없는 서촌 여행이 돼버렸다.

 


 광화문 일대는 8월 6일에 있을 광장 개장 준비로 복잡했다. 오랜만에 탄 녹색 버스는 세종대로가 아닌 율곡로로 바퀴를 틀었다. 거리엔 차만큼이나 사람도 많았다. 퇴근 시간과 맞물린 종로 일대는 금요일 오후의 들뜬 설렘으로 가득했다.


 예상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해 메신저로 양해를 구한 뒤 식사를 주문했다. 페스코(pesco)를 시작하면서 바뀐 것은 역시 식당 선정이다. 과거에는 식당을 가리지 않고 잘 다녔지만 식단을 바꾸고 나서부터는 육류와 가금류만을 주재료로 하는 식당엔 갈 수 없게 됐다.



 약속의 주인공인 사촌 오빠는 장염에 걸렸고, 나는 음식을 가려 먹었다. 둘이 먹을 수 있는 적절한 메뉴는 단호박 수프와 가지 피자.



 그저 광화문 일대 비건 식당을 검색해 적당한 곳을 찾아간 것인데, 나중에 지인의 말을 들어보니 이곳은 통 단호박 수프 맛집으로 소문이 난 곳이라 한다. 맛을 보니 그 명성이 거짓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맛집에 가도 맛있다는 생각을 잘 안 하는 편인데 이곳의 단호박 수프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만한 건강식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장염인과 페스코인은 그동안의 근황과 라떼 이야기를 풀며 서로의 대나무 숲이 돼 주었다. '어렸을 때 우리가, 외할머니가, 각자의 집이'로 시작한 이야기들은 '종로에 뭐 볼꺼있다고 매번 오냐'는 오빠의 핀잔으로 이어졌다. '매일 종로에 오는 서울 사람인 오빠가 뭘 알아'라고 받아치려다 '그래. 나 같아도 종로에 일하러 오면 지긋지긋하기도 하겠다.'는 생각으로 마무리됐다.


 40여 분의 짧은 식사 후, 장염인은 야근을 하기 위해 회사로 돌아갔다. 멀어져 가는 나이 든 사촌 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실 오빠의 장염은 산재가 아닐까. 내과적인 부분으로 산재받긴 어려울 텐데.'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옮겼다.





금요일 저녁 청계천의 낭만, 그리고 습도.



 서울 하면 떠오르는 노래 Sam Fischer의 This City.




This city's gonna break my heart.
This city's gonna love me, then leave me alone.
This city's got me chasing stars.




 서울은 아름다운 도시지만, 이곳에서 사람들 틈에 파묻혀 살다 보면 개인의 행복을 유지하며 살기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종로를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난 여행객의 시선에서 종로를 바라보았기 때문일 거다. 이 잠깐의 스침도 버거운 내가 이곳에 둥지를 틀고 살 수 있을까.













2021년 연말의 조계사 전경



 종로에 오면 꼭 방문하는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

 

 얼마 전 인터넷에 재미있는 글이 올라왔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꽤 많은 이들이 '불교에 가까운 무교'를 믿는다는 글이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주위를 보면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조계사는 계절마다, 올 때마다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가을엔 핑크 뮬리가, 겨울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등불과 연등이. 그리고 계절을 따라 여름에 피는 연꽃이 경내에 가득했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연꽃. 연못 위에 자라는 연꽃 군단의 위용이 실로 엄청났다. 굵직굵직한 연꽃의 뿌리는 커다란 대야 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불심 하나로 연못을 통째로 옮겨오다니. 역시 덕후는 건드는 게 아니다. 꽃이 상할까 더 가까이 가지는 못했지만 조계사 경내에 만개할 연꽃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템플 스테이 당시 배운 어설픈 합장을 하며 대웅전 안으로 들어섰다. 연말의 추위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대웅전 안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낮의 열기와 습기로 인해 한증막을 방불케 했다. 등 뒤로 땀이 연신 흘렀다. 수행의 일부라 생각하고 눈을 감았지만 높아진 불쾌지수만큼 명상의 주제는 5분 있다 갈까, 지금 갈까로 바뀌었다. 찝찝한 습기가 나를 감쌌다. 갈까. 말까. 불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자니 삼존불의 눈매가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 순간 내 귀에 석가여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식으로 할 거면 그냥 가." 신의 계시가 들릴 정도로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 삼존불의 목소리가 귓구멍을 강타할 정도니 내 할 도리는 다한 듯 싶다. 그래. 시간보단 정성이지. 다음을 기약하며 삼존불에 합장했다.





극락으로 가는 문





 석가 "넌, 극락 안보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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