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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란 Apr 02. 2023

넘어지면 일어나야지

다시 봄이 온다면

산책하기 참 좋은 봄날입니다


3월 17일, 양력 내 생일이다. 

생일에는 으레 미역국을 먹지만 내 생일은 예외다. 내가 직접 끓여야 하는 것이 탐탁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아이들 챙기기도 촉박하게 늦잠을 잔 터였다. 계란프라이와 김, 생선 한 마리 구워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아침밥상을 차려냈다. 미역국과 케이크는 없지만 무뚝뚝한 사내아이 둘에게 생일 축하 인사받아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아이 둘을 보내고 대충 집안을 정리하고 현관을 나섰다.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이 그립기도 하고 이번 주는 여유가 있어 엄마 집에 가기로 했다. 이럴 땐 직장인이 아닌 게 너무 좋다. 버스를 타고 병점역에 내려 엄마가 좋아하는 보라색 수국을 한 다발 샀다. 은은한 꽃향기에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당역 도착’이라는 빨간 글씨를 보고 급하게 전철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마자 깨달았다. ‘앗! 반대로 탔네.’ 

습관이 무섭다고 매번 타던 서울행을 탄 것이다. ‘진작에 출발했다고 했는데 조금 있으면 전화벨이 울리겠군.’ 다행히 엄마는 여유 있게 기다려주었다. 집 근처 마트에서 딸기 2팩을 사고 선물로 받은 쿠폰으로 아이스크림도 교환했다. 두 손에 무언가 잔뜩 들고 있으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아버지들이 집에 통닭 한 마리, 붕어빵 사들고 올 때 기분이 이랬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보니 꽃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 봄이다.’ 


나의 깜짝 방문은 엄마를 기쁘게 또 바쁘게 만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미역국 냄새가 집안을 채웠다. 소고기를 넣은 미역국이 한 냄비,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아 이래서 전화가 안 왔구나’ 생각이 든 순간 고마우면서도 마음 한쪽이 미안해졌다. 오늘은 엄마가 나 낳느라 애쓴 날인데 말이다. 순간 여러 마음이 교차되며  마트에서 사 온 과일과 아이스크림을 꺼내놓고 뭘 이렇게 많이 했냐며 너스레를 떤다. 

아빠는 오늘도 어김없이 거실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다. 까랑까랑 배우들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울린다. “아빠 점심 먹어요.” 아빠가 식탁으로 오는 사이 슬그머니 리모컨을 들어 전원버튼을 누른다. 

“아빠 운동은 계속하고 있어요?” “....(끄덕끄덕)”  이번주는 날씨 풀려서 주차장 말고 밖으로 운동하러 간다고 엄마가 한마디 거든다. 

“우리 밥 먹고 산책하러 가요.”           




아픈 게 무슨 벼슬이야


점심을 먹고 산책길에 나섰다.

바지 입기-겉옷 입기-모자 쓰기-마스크 쓰기는 혼자 잘했는데 신발 신기는 쉽지가 않다. 오른쪽이 불편해진 후로 아빠의 신발은 모두 끈이 사라졌다. 움직임이 가뿐하면 허리를 숙여 손으로 신발을 당겨 신을 텐데 차렷자세로 오른발만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서있는 모습이 로봇을 떠오르게 한다. 

매일 겪는 일이지만 오늘도 인상을 여러 번 쓰고 나서야 현관문이 열렸다. 출근전쟁이 아니고 신발전쟁이다. 

산책코스를 정하는 건 전적으로 아빠의 권한이다. 어디로 가겠다 말도 없이 앞장서서 걸어가면 그게 코스가 된다. 엄마와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앞을 보면 혼자 저만치 앞에 가 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간다. 왼팔은 앞뒤로 신나게 흔들리는데 오른팔은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한참 걸어가다 보니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매화꽃이 한창이다. 엄마와 기념사진이라도 남기고 싶어 멈춰 섰는데 아빠는 여전히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예전에도 아빠의 걸음은 늘 빨랐지만 빨리 오라는 채근을 하지 않는 것이 달라진 풍경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코스에서 엄마와 이야기하느라 잠깐 시야에서 놓친 사이 아빠는 바닥에 앉아있고 지나가던 분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린다. 무슨 일인가 놀라서 뛰어갔다. 

“아빠 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 

팔을 잡아 올리는데 혼자서는 역부족이다. 오른팔과 오른다리에 힘이 없어 앉으면 일어나기가 힘든데 넘어지기까지 했으니 엄마까지 합세해서 아빠를 일으켰다. 

“그러게, 같이 가지 혼자 가니까 넘어지지.!” 

엄마의 말에 팔을 뿌리치며 씩씩거리는 아빠.

무릎을 보니 두꺼운 바지인데 바닥에 긁힌 자국이 선명하다.

“아니, 아픈 게 벼슬이야? 

길이 이렇게 평평한데 잘 보고 가야지. 왜 이유 없이 넘어지는데!!” 영락없는 세 살 아이한테 하는 말이다.  

“아빠 무릎 아파?” 

물어봐도 답이 없다. 다리에 힘이 없어 넘어진 걸 일부러 그랬을 리가 있을까.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니 오른 무릎을 바닥에 세게 쿵 찧었나 보다. 

세 살 아이도 넘어지면 혼자 손 툭툭 털고 벌떡 일어나는데 우리 아빠는 이제 넘어지면 혼자 일어나는 게 힘든 사람이 되었다.       


    



다시 봄이 온다면


아빠는 바닥에 앉아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집에 돌아와 소독을 하고 후시딘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주며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딸이 오랜만에 왔는데 넘어지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얼마나 속상했을까. 본인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진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없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도 없다.


아빠의 칠십은 아내와 매일 하루종일 시간을 보낸다. 전원일기, 아들과 딸, 여인천하 등 드라마 다시 보기 하는 생활에 익숙해가고 있다. 그래도 병원에 있을 때를 생각하면 이것만이라도 참 감사한 일이다.

말을 하는 것도 본인 이름 쓰는 것도 최근에 가능해진 일이다. 아직도 밥을 먹을 때 젓가락보다 숟가락이, 숟가락보다는 손이 나가지만 그래도 먹여주지 않는 게 참 다행이다. 

나를 알아봐 주고 애들 안부를 물어보기까지 참 힘든 시간을 지나왔다. 아빠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눴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더 늦어지기 전에 전지적 시점으로 아빠의 삶을 스캔해보고 싶다. 충분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라 이야기해주고 싶다. 아빠의 마흔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내주어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빠가 지금보다 조금 더 건강해져서 좋아하는 낚시도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아들, 딸 손주들이 잘 살아가는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봐 주었으면 좋겠다.      

‘넘어지면 일어나야지.’ 엄마의 희망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다시 봄이 온다면 아빠는 일어날 수 있을 거야..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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