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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정 Aug 26. 2022

음예 공간 예찬

어둑어둑하고 내밀한 공간이 필요하다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꺼려한다. 어린 시절 한복에 댕기머리를  때도 금박댕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청소년 시절에는 엄마가 골라준 파스텔 톤의 옷을 입었지만  돈으로 옷을 사게  후에는 검정, 흰색, 회색, 베이지의 무채색 옷을 선호한다. 눈에 띄거나 드러나는 것이 싫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도 , 헛간, 뒷간, 지붕 처마 아래 그늘진 곳이었다. 등불도 남포등, 장명등이 좋다. 너무 밝아서 모든 것이 드러나는 LED 형광등 아래는 낭만적이지 않다. 그래서 내가 상상하는 키스신은  감빛 가로등 아래다. 연인의 얼굴에 깨처럼 내려앉은 주근깨도 기미도 보이지 않고, 뭇별처럼 떠오른 여드름도  보이고. 희붓한 가로등 아래나 별빛 달빛 아래 연인이 가장 아름답다. 봄날엔 달밤의 싸리꽃 옆도 괜찮다. 과자 중에서 가장 색깔이 아름다운 것은 양갱이라고 생각한다. 검은  안에 형언할  없는 내밀한 빛깔이 담겨 있다. 양갱의 달콤함은  빛깔의 덤일 뿐이다.      


일본 책 중에 음예공간예찬이라는 책이 있다. 뭔지 모르게 끌려서 잡았다 놓았다 하는 책이다. 그 책에서는 선명한 것보다는 가라앉은 그늘을, 반짝반짝 비치는 광택보다는 세월이 묻어나는 낡음과 가라앉음에 가치를 둔다. 일본의 집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 좌식으로 생활하는 다다미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다다미방의 한쪽에 단을 높이고 꽃꽂이 조각 등을 진열해 놓으며 장식품을 거는 토코노마가 딸려 있다. 이곳은 어두움과 조용함을 가진 공간이다. 서화를 걸거나 화병이나 장식물을 놓기 위해 바닥을 한 단 높여 놓은 곳으로 좌식형 일본 집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실내장식이다. 무로마치 시대 일본의 전통 예술인 다도, 꽃꽂이, 노, 하이샤 등의 양식이 확립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토코노마는 전통적인 분위기로 문학적인 의미를 지녀야만 했으며, 서로 관련되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공간을 연출하고 상징적인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했다. 그리고 쇼인이라고 하는 들창을 다는데 창문에는 종이를 발라 외광을 줄였다. 유리창 밖에 다시 아마도라는 두꺼운 판때기로 된 덧문을 설치해 햇빛을 누르고 비와 바람을 막기도 한다.      


우리나라 전통집에도 이런 공간은 흔히 있었던 것 같다. 오디 빛 대청마루도 햇볕을 그대로 다 받아 안지 않아서 안쪽 부분은 늘 어둑하고 찹찹했다. 나는 다락도 좋아했는데 엉금엉금 층계를 올라가면 잘 쓰지 않는 물건들이 잊힌 채 시간에 닳아가고 있었다. 햇볕 아래 노는 게 싫증이 난 날은 다락에 올라 작은 절구공이나 부엌살림, 오래된 우표책, 사진첩, 이제는 입을 수 없는 옷가지들의 아련한 냄새에 젖어 한참을 멍 때리고 있었다. 광은 또 어떤가. 짚단과 쟁기, 보습, 끌개 등의 농기구가 놓여 있어 건초 냄새와 쇠 냄새가 어울린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요즘 현대식 건물에선 채광이 좋고 환한 것을 추구하지만, 집은 좀 가라앉은 그늘을 담은 음예 공간이 있을 때 내밀성이 증폭되어 자궁 공간이 되는 것 같다. 언니가 고동집 같은 자기 방에 앉아 레고 맞추기로 몇 달을 보낼 때 해체된 작은 조각들을 맞추듯 우리의 마음도 때론 재조립이 필요하구나 생각했다. 뼈 파괴 세포와 생성 세포가 길항하듯이 우리의 하루도 그렇게 나아갔다 물러났다 쌓았다 허물었다를 반복하며 슬픔도 시련도 견딜 만한 것이 된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요나 공간의 어둑어둑함과 안온함이다. 한동안 내 취미는 종묘 산책이었다. 종묘야말로 곳곳에 음예 공간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 종묘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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