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떠오른 라떼의 기억
때는 바야흐로 OO 년 전. (작가의 신상정보는 소중하므로 구체적인 연도는 공개하지 않겠다.. 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너무 옛날이라 비밀.)
남들 다가는 어학연수를 핑계로 휴학을 했지만 너무나 빨리 1학기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팽팽 놀고 있던 어느 날, 학교 취업센터에 인턴십 공지가 떴다. 지금이야 너무나 흔하지만 그때는 인턴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시절. 노느니 돈도 벌고 경력도 쌓고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지원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생판 처음 이력서를 쓰려니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까마득했지만 다행히 인터넷을 여기저기를 참고하여 작성한 국, 영문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취업센터 담당자가 보고 몇 군데를 고쳐 주었고, 덕분에 겨우 제출하기 부끄럽지만 않게 서류를 작성해서 내게 되었다.
인턴기간이 애매하게 학기말에 걸쳐있어서 재학 중인 학생들은 지원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내 예상은 적중하여 몇몇 소수의 휴학생들만 지원을 했다. 거기다 지원일자가 상당히 촉박했기 때문에 지원자가 많지 않았고 그 낮은 경쟁률 덕분에 다행히도 인턴 자리에 합격되어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들어가서 상황을 알아보니 예상외의 몇 가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
첫 번째로 왜 우리 학교에 취업공고를 내게 되었을까.
그 당시 각 대학별로 인턴십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이 유행처럼 시작되었는데 학교 자체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에게 학점도 주고 소정의 수고료도 지급이 되는 식이었다. 또 이것이 정부지원과도 연계되어 있어서 이런 것들을 잘 활용하면 기업에서는 따로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학생들을 인턴으로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때가 시행초기여서 설명이 학교마다 중구난방 복잡했다. 그런데 이때 내가 다니던 회사의 취업센터에서 보내준 자료가 가장 명확하게 제도설명이 되어있었고 기업입장에 맞게 작성이 편리한 간소화된 서류를 제공했다고 한다. 따라서 실무에 바쁜 직원들은 본인들이 일하기에 가장 편한 학교에 취업공고를 보냈던 것이었다. 실무 담당자가 조금만 신경을 쓰면 이렇게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배웠다.
자, 그렇다면 두 번째, 나는 어떻게 뽑히게 되었을까.
공고는 딱 3일 간만 게시되었고 나는 제출 마감일에 맞추어 서류를 제출했었다. 그러나 3일만 공지를 게시했다는 것은 사실 회사에서 엄청 촉박하게 사람을 찾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래서 마감일도 되기 전에 이미 제일 먼저 지원을 했던 학생을 뽑으려고 내정을 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 결정을 뒤집게 되었을까. 그건 바로 평소부터 했던 준비를 잘 나타내준 글쓰기의 힘이었다.
처음 서류를 제출한 학생은 아무래도 급하게 서류를 내다보니 이미 본인이 작성해 둔 자료를 그대로 냈던 것 같다. 그래서 인사 직무에 지원을 하면서도 아주 일반적인 (어느 직무에나 낼 수 있는) 자기소개서를 냈다고 한다. 그런데 내 자기소개서에는 이미 제목부터 떡하니 '나는 인사전문가가 될 거야.'라고 적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대학 때부터 명확히 진로를 정해 오는 친구들이 별로 없을 거라고 예상했고 그 상황에서 나를 어필하고자 학부 수업 중에 얼마나 인사관리 수업을 많이 들었는지, 실제로 내가 관심 있는 부분이 이 직무가 맞다고, 내가 지금 갑자기 이 내용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나는 준비된 사람이라는 내용으로 뭔가 열심히 써서 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부사장님이 실제로 내 자기소개서를 보시고 그 부분에 크게 동그라미를 쳐 놓으셨던 것을 보았다. 그렇게 나는 평소에 했던 준비와 그것을 적절히 나타낸 글 덕분에 이미 결정된 후보자를 물리치고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졸업 후 국내 대기업 공채로 다른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재직하던 중, 다시 이 회사의 부름을 받고 정식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고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유지하는 HR 커리어의 시작점이 되었다.
오늘 갑자기 이 일이 떠오른 것은 가까운 지인의 최근 취업소식을 듣고 나서이다.
그분의 남편은 갑작스러운 건강문제로 일을 쉬게 되었고 지인은 전업주부였었지만 이때부터 생계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러던 중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따두었던 사회복지사 자격증으로 우연히 집 근처 노인복지관에 4개월 산후대체 직원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는데, 경력만 없을 뿐이지 워낙 성품이 훌륭하고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4개월의 기간이 6개월로 늘어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정규직 채용으로 바뀌게 되었다.
예전 내 경험이나 최근의 지인의 경험을 통해 다시금 평소 내가 하는 것이 결국은 다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일이 어떤 것을 나중에 가져다줄지 당장은 불투명하더라도 내가 가는 이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공평한 시간.
그 시간 동안 꾸준히 나를 갈고닦는다면 기회는 언제든 올 것이고, 나는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고, 주위가 막막하지만 그래도 나를 믿고 한 걸음 더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