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잠자리에 꼭 필요한 것
우리 부부는 TV를 잘 보지 않는 편인데, 가끔 보게 되면 부부들이 함께 출연하거나 일상을 보여주는 방송을 한번씩 보곤 한다. 얼마 전,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재미있는 대화를 들었다. 요즘 방송에서 자주 보이는 한 부부가 출연한 방송이었는데, 아내는 성욕이 끓어넘치고 남편은 심각한 무성욕자라서 갈등을 빚는다고 했다. 요즘에는 저런 얘기도 편하게 방송에서 하는구나. "아내와 키스하면 어떠신가요?" "키스요? 연인이었을 때는 신선한 활어같던 혀가, 결혼을 하고 나니 마치 우설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듣고 있는거지! 신선한 충격이었다. 부부는 이런 이야기를 타인과 함께 나누며 유쾌하게 깔깔 웃었다. 진정 29금은 붙여야 할 것 같은 어른들의 대화였다. 어른의 대화라, 우리 부부가 사람들이랑 저렇게 대화를 나누어본 게 언제였지? 가만있자...비단이가 지금 일곱살이니까...
비단이의 탄생과 함께 신혼이 끝난 직후부터, 남편과 나의 달달했던 잠자리는 매일이 전쟁이었다.
조금이라도 빛이 새어 들어오면 잠들지 못하거나 자다가도 벌떡 깨는 비단이 덕에, 우리는 사시사철 방문을 닫고 암막커튼을 쳤다. 겨울철에는 그나마 조금 나았지만, 열대야가 내린 여름날이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두세 시간 자다가 깨는 날이 많았다. 아이는 사시사철 아빠의 몸에 찰싹 붙었고, 밤새 아빠 냄새를 맡고 만지작대야 편안히 잠을 잤다. 잘 때 옆에서 돌아눕는 기척만 내도 번쩍 깨는, 소머즈같은 잠귀를 지닌 남편에게는 쥐약같은 환경이었다. 남편의 습성을 알기에 나 역시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소리내지 않고 자려고 노력하지만 육아의 고단함 끝에 수마(睡魔)에게 먹힌 후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들과 나는 나란히 코를 골고 이불을 걷어찼다. 그런 다음날이면 아침에 마주한 남편의 얼굴은 말라붙은 다시마같았다. 입가는 허옇게 뜨고, 피부는 윤기를 잃어 푸석하니 검었다.
조금 나아지나 싶어질 때쯤, 둘째가 신생아로 안방에 합류했다. 다행히도 순둥한 둘째는 잠귀가 예민하지 않아 시끄러운 환경에서도 쿨쿨 자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뱃고래가 컸다. 졸려서 울지는 않았으나 배가 고파 내내 울었다. 어차피 잠잘 수 없기는 똑같았다. 다만, 추가된 것이 있다면 동생이 빽빽 우는 소리에 비단이가 깨서 같이 운다는 것이었다. 방을 분리할 수도, 배고프다고 우는 아이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둘째가 배가 고플 것 같은, 칭얼댐의 신호를 보내는 것 같은 기척을 느끼면 득달같이 일어나 분유를 타서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아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는 상황을 막았다. 남편과 나는 나란히 꾸덕꾸덕 마른 건어물처럼 퀭해져갔다.
밤의 사정이 이렇다보니, 뜨거운 잠자리는 커녕 서로 등을 돌리고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히 자는 날이 많아졌다. "천연기념물도 이렇게 아끼지는 않았을 거야.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안 낀다던데, 이러다가 몸에 이끼가 피겠어." 서로 장난섞인 섹드립도 가끔 건넸지만 그러기엔 서로의 얼굴이 정말이지 못 봐줄 꼴이었다. 우리는 종일 붙어있었지만 큰아이의 상태가 나빠지면서 대화가 점점 줄었다. 어쩌다가 대화를 시도해도 자꾸만 끝이 날카로워지곤 했다. 점차 꼭 필요한 대화 이외에는 나누지 않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점점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줄여갔다. 솔직히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가 불편했다. 우리 나이쯤에 지인을 만나면, 으레 묻는 안부에는 "애들 잘 크지?"라는 말이 꼭 들어간다. 이 평범한 질문에 나는 '네'라고도, '아니오'라고도 할 수 없었다. '잘 큰다' 라는 말을 장애아이에게 적용시키려면, 어떻게 크고 있어야 되는 걸까? "오늘은 '이야이야' 말고 '이히'하는 소리를 냈어요. 하하, 참 대견하지요?"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상대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무척 난처하리라.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가볍게 물은 안부에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고, 나의 일상을 어디까지 오픈해야 할 지를 정하는 것 또한 어려운 부분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웠지만, 사람과의 대화가 점점 부담스러웠다.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늘 'small talk' 이 그리웠다. 그러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엔 심각하게 나눌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하루종일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느새 공기마저 검게 데워졌다. 고된 하루를 끝내고 싶어 슬그머니 불을 끄고 누우면, 종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나며 다시 마음이 검게 커튼을 쳤다. 하나 빼기 일이 꼭 0은 아닌 것처럼, 세상의 모든 걱정이 나누면 꼭 반으로 줄어드는 것만은 아니었다.
어느 밤,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최근에 남편한테, '오빠 오늘 하루는 어땠어? 라는 질문을 해본 적이 있나?' 되짚어보건데, 몇 년간 나는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다. 그저 내가 남편에게 꺼내는 말이라고는 "비단이 언어수업을 늘려야 되는거 아닐까?" "둘째 내일 접종일이야."와 같은, 목적이 있는 말밖에 없었다.
사실 우리는 가벼운 드립을 서로 치는 농담을 좋아하고, 나는 남편의 유머를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다. 남편은 보편적으로 모두를 웃기는 재주나 주변머리는 없지만, 나를 웃기는 재주만큼은 정말이지 탁월했다. 농담삼아 '나는 오빠의 드립력이 마음에 들어서 결혼했어' 라고 말할 만큼, 생각지도 못한 말로 나를 웃기곤 하는 사람이었다. 가령 내가 "오빠, 나 빵 먹고 싶은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살찔까봐 못먹겠어." 라고 하면,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 '미아야 괜찮아, 빵은 살 안쪄. 살은 네가 찌지." 그런 남편의 유머를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며 낄낄 웃다보면 하루가 몽글몽글하게 부푼 머핀처럼 행복해졌다. 우리는 늘 그렇게 행복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일정거리를 유지해야만 평온한 사이가 되었을까.
뒤돌아 누워있는 남편의 등을 바라본다. 내가 예뻐하는 넓은 등이 오늘따라 찬바람이 고이듯 서늘해 보인다. 불현듯 그도 참 외로웠겠다 싶었다. 나도 그렇지만, 남편도 고작 삼십대 후반이다. 한창 활동하고 놀고 싶은 나이에 매일같이 안팎으로 시달리는 우리 남편. 나는 예전부터 남편의 넓은 등을 안고 코를 킁킁대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래, 오랜만에 안전거리 한번 시원하게 무시해볼까?
나는 살며시 다가가 조심스럽게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역시나 잠귀가 예민한 남편은 내 기척에 금세 깼다. 나는 발가락을 비비적대며 귓가에 대고 물었다.
"오빠. 오늘 하루 어땠어?"
"어떻긴 뭘 어때. 자다깼는데 졸립지. 너 왜 여깄냐."
"나는 오늘, 오빠가 사준 귤이 너무 맛있어서 기분이 좋았어. 그리고, 당신 냄새를 맡으니까 기분이 좋아."
남편은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나를 멀뚱히 쳐다봤다. 약간,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싶은 얼굴이기도 했다. 사려깊은 성격의 남편은 생각나는 대로 툭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잠시 후 남편은 잠이 홀랑 깬 얼굴을 하고 내게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꼬대는 아닌 것 같고. 혹시... 우리 셋째 생겼니?"
소통의 긴 부재는 가끔 이렇게 심각한 오류를 가져온다. 나는 자웅동체가 아니야 오빠..
아픈 아이를 키우던, 잘 크는 아이를 키우던간에 모든 부부에게는 둘만이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언어가 꼭 필요한 것 같다. 자기전에 한마디라도 나누고 잠들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애들부터 잠자리를 분리해야 할 텐데.. 가만있자... 그게 되려나.... 지금 우리 집에 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