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대화가 더 많이 필요해
: 가디건이 잘못했네
며칠 전, 창문을 연 채 설거지를 하는데 문득 손이 시리다고 느껴졌다. 이제 진짜 가을이구나 싶다. 매일같이 돌아다니지만 아이들이 태어난 후부터 옷차림에 대해 크게 신경쓴 적이 없었다. 대부분 그렇듯 나도 이십대때는 하루도 같은 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고, 늘 블라우스나 셔츠에 치마, 아니면 원피스 차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간은 전생일 뿐이다. 현재의 나는 일주일 중 5일은 검은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교복처럼 입는다. 내가 스티브잡스는 아니지만, 하도 그렇게 입다보니 약간 시그니처 같은 옷차림이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침마다 옷을 고르는게 조금은 귀찮다. 어차피 애들이랑 뭉개고 종일 일하는데 옷차림이 뭐 대수인가, 그냥 잡히는 대로 입으면 되지. 어제 빨아서 개어놓은 옷은 항상 가장 앞에 있으니 또 집어들고 입으면 그만이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애들이 기특하게도 크게 보채지 않고 잠들었다. 시간은 이미 늦은 새벽이다. 얼른 자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왜 이렇게 잠자기가 아까운지 모르겠다. 사실 핸드폰 게임도 전혀 하지 않고, 영상을 보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밤에 핸드폰을 들여다본다고 해도 별로 할 것은 없다. 좋아하는 책을 보다가 자거나, 가끔 계절이 바뀌면 사람들은 뭘 입고 다니나 궁금해서 쇼핑몰의 코디를 뒤적거려보는 정도. 그러다가 문득 예뻐보이는 물건이 있으면 나답지 않게 덥석 사버리곤 하는데, 대낮에는 잘 생기지 않는 용감함이 새벽에는 왜 가능한지 모르겠다. 여러모로 새벽은 참 위험한 시간이다.
그날도 그랬다. 낮에 일하다가 보니, 사람들의 옷차림이 많이 달라졌다 싶었다. 가을은 사계절 중 가장 옷 보는 재미가 쏠쏠한 계절이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셔츠나 가디건 차림이 많이 보여서, 예쁘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보는 것이 좋다. 그렇게 눈으로 쭉 훑어보는데, 문득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잘 손질된 갈색 머리에 흰색 티셔츠에 초록색 가디건, 청바지를 입고 깨끗한 흰 운동화를 신은 여자였다. 특별할 것은 없는 차림새인데 계절 탓인지 가을가을한 사람들의 웜한 컬러속에서 유독 눈에 톡 띄었다. 음, 예쁘네. 그날 새벽에 나는 충동적으로 폭풍 검색을 했고 가디건 두 벌을 샀다. 사고 싶던 톤다운된 초록색 가디건과, 유니폼 같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검정색으로. 추석이 다가오는 시기다보니 배송은 늦어졌고 바쁜 일상에 나는 택배를 시켰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며칠 뒤. 반팔만 입기엔 밤에는 쌀쌀하다 싶은 날이었다.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니 문앞에 택배가 놓여있었다. 우리집은 택배를 많이 시키는 편이라 그냥 뭐가 왔네 또, 하고 들어왔는데 짐을 정리하던 남편이 물었다. "당신 옷 샀어?" 아참, 내가 뭘 샀었지 며칠 전에. 드디어 왔군. 나는 "응" 하고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옷이야 이따가 뜯어보면 될 일이고, 원래 택배는 혼자 있을때 언박싱하는 맛이니까. 남편이 봉투에 적힌 송장을 보다가 한 마디를 더 했다. "너는 꼭 나한테 말 안하고 샀다가 물건 오면 '응 샀어' 하더라. 나는 작은 것 하나 사도 너한테 다 얘기하고 그러는데 너는 꼭 그래." 남편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묻어있었지만 나는 다른 데에 정신을 쏟으면 상황을 잘 캐치하지 못하고 입이 먼저 나오는 나쁜 습관이 있다. "응 옷 하나 샀는데, 어차피 오면 알 걸 일일이 얘기해야 해?" 나는 성의없이 말하고 하던 일을 마저 하는데, 돌아와야 할 남편의 대답이 뚝 끊겼다. 아차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나 남편이 화가 났다. 남편은 진짜 화가 나면 눈꼬리가 올라가고 입꼬리는 내려가서 도깨비같은 얼굴이 된다. 휴, 입이 방정이지. 또 사고를 쳤다.
남편은 내가 툭툭 말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진중한 성격의 남편은 생각이 많은 편이라 오백가지 생각을 하면 한마디쯤 하는 사람이다. 말부터 하고 나서 오십쯤 생각하다가 마는 나와는 좀 다른 종자다. 지금도 아마 옷을 사서 화가 난 게 아니라, 내가 '샀는데 어쩌라고?' 라는 식으로 말한 것이 서운할 것이다. 결혼 전에도 그랬지만, 남편은 내가 자기의 카드로 얼마짜리 물건을 사건 터치하지 않는다. 그냥 늘 "그게 갖고 싶었어? 맘에 들어?" 라고 묻고, 그렇다고 하면 "잘했네."하고 더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 옷은 땜통만한 구멍이 나도 그냥 입지만 내 옷은 바늘구멍만한 흠이 나도 보기 싫다며 쓰레기통에 갖다버리는 사람이다. 왜 사람은 항상 저지르고 후회하는지 모를 일이다. 잠시 말이 없던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자기야, 나는 정말 작은 거 하나를 사도 당신한테 미주알고주알 얘기하잖아. 하다못해 속옷 한 장 사도 얘기하잖아. 그게 내가 말하는걸 좋아해서 그러는게 아니고, 진짜 작은 일상이니까 '너'하고 공유하고 싶은거야. 우리는 늘 상황이 어렵고 힘들고 심각하잖아. 그런 얘기는 일부러 서로 나누지 않고 어느 정도는 혼자 삭히잖아. 그러다보면 우리는 점점 할 얘기가 없어져. 벌써부터 작은 얘기가 나눌 게 없어지면, 그때부터는 멀어져버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이런 행동이 서운해. '길에서 이런거 봤는데 나도 사면 안돼?'라고 당신이 대화를 걸어줬으면, 나는 기꺼이 당신한테 제일 예쁠 옷을 같이 골랐을거거든. 나는 네가 참 어렵다. 내 인생에서 제일 못 풀겠는 문제가 너 같아."
구구절절 맞다. 남편은 내가 타고난 성격이 무심하고 둔해서 뭐든 일일이 얘기하는 사람이 못되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내가 쇼핑에 큰 취미가 없고, 신제품보다는 쓰던 게 쓰는게 편해서 맨날 똑같은 걸 주문하거나 같은 색의 옷을 여러 벌 사는 사람인 것도 안다. 최근 들어 아이들 문제로 경제적으로 휘청이다보니 남들 다 하는 것들도 대부분 안 하고 사는걸 서로가 잘 안다. 그런 내가 생전 입지 않는 초록색 옷을 산 것을 보고, 남편은 나의 마음을 알아주고 대화를 나누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내가 가을만 되면 "추석빔이야 추석빔!"이라며 되도 않는 핑계로 옷을 한 벌씩 사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잘 하지 않는 애교도 받아주고 싶고 대화도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남편의 마음을 늘 한발 늦게 안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염려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정하고 달콤해질 수 있는 것이 일상인데 말이다.
작은 대화. 스몰 토크, 라고 불리는 소소한 이야기. 오히려 크고 중한 이야기는 특정 대상과 반드시 나누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정말 시시콜콜한 내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아무에게나 절대 하지 않는 대화다. 나는 오늘도 옆에서 사소한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음을 잠시 잊었다가 다시 깨닫는다. 새삼스레 곁에 있는 사람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화를 풀어주고 싶었지만, 나는 사과하는 방법을 잘 몰라 늘 핀잔을 듣는다. 그래도 내가 먼저 미안할 짓을 했으니, 사과를 시도해야한다. 짱구를 굴리다가 한마디를 해봤다.
"오빠,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래? 그땐 나랑 성별 바뀌어서 태어나도 돼. 내가 잘해줄게."
"옷, 내가 입고 원래 짠 하고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됐어. 그치?"
"..... 내가 말했지? 너는 애교를 잘못 배웠어. 다시 생각해봐."
오늘도 나의 소통은 불통을 받는다. 남편이 더 멀찍이 도망가기 전에 한 마디 더 걸어볼 궁리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