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의 《세상의 모든 아침》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그만두는 이유는 분명했다. 조금은 늦었지만 도전하고 싶은 무언가를 찾았다는 사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실행할 수 있는 환경에 감사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계획을 털어놓았을 때 개인적인 기대와는 다르게 걱정 섞인 조언이 이어졌다. "꿈을 좇기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회사 밖은 더 치열한 거 알지?", "지금 같은 자리는 다시 구하기 힘들어", "당장 생활비는 어떡하려고?", "후회하지 않겠어?", "취미로만 해도 되잖아", "너무 이상만 좇다가 현실을 놓치면 후회할 수 있어", "하고 싶은 일도 결국 돈이 안 되면 오래 버티기 힘들어", "결국 다들 다시 돌아오더라" 하지만 이런 조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느껴온 공허함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선배들은 하나 같이 "버텼다"는 말로 하루를 정리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의 말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어느새 그들의 전철을 밟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 가늘고 긴 쇠사슬을 끊어버려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선택에 앞서 가장 두려웠던 말은 늦었다는 말보다 이대로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냈다는 후회였다. 더 후회하지 않기 위해 후회가 남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렇게 맞은 퇴직 후 첫 번째 아침은 평소보다 늦게 찾아왔다. 몇 시에 눈을 떴는지조차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대충 8시 정도였던 것 같다. 평소보다 두어 시간을 더 잤지만 여전히 피곤했고, 여전히 몸은 무거웠다. 시간에 쫓겨야 할 이유가 사라지자 오히려 더 나른한 같았다. 잠에서 깨기 위해 부엌에서 커피콩을 갈기 시작했다. 분쇄된 원두의 향을 맡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커피를 끓이고 평소처럼 커피를 마시고 나서야 '뭐 퇴직해도 별거 없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하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던 침대, 익숙한 집, 또 익숙한 창밖 풍경, 늘 보던 버스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는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했다. 하지만 더는 그 속에서 뛰어들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평온하면서도 또 두려웠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의 아침은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었다. 특별하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평범했던 그날의 아침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와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동시에 주어지는 순간이었다.
내 삶을 예술과 견줄 수는 없지만, 그날 아침을 떠 올린 건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세상의 모든 아침》이었다. 소설은 17세기 프랑스의 비올 연주자 장 드 생트-콜롱브(Jean de Sainte-Colombe)라는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는 아내를 잃고, 두 딸과 함께 시골집에 틀어박혀 살고 있었다. 세상과는 단절한 삶. 그는 음악에만 몰두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집 바로 옆에 나무로 만든 작은 오두막을 지었는데, 연주를 위한 작은 공간으로 사용했다. 그는 밤낮으로 비올을 연주하면서 죽은 아내를 그리워했다.
침묵과 음악에만 매달려 있을 때 한 젊은 비올리스트 마랭 마레(Marin Marais)가 찾아오게 된다. 그는 뛰어난 재능과 야심을 품고 생트-콜롱브의 곁에서 음악을 배우게 된다. 그는 화려하면서 사람들을 감동시킬 충분한 수준의 연주 실력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는 스승의 고독과 애도, 상실의 무게를 담아내는 방식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마랭 마레는 음악적 재능으로 부와 명예를 쌓기 원했다. 그는 결국 베르사유 궁정의 연주자가 되어 화려한 무대와 귀족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위치까지 오르게 된다.
생트-콜롱브와 마랭 마레, 이 둘이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은 본질부터 차이가 났다. 생트-콜롱브는 아내와 함께한 마지막 아침, 되살릴 수 없는 사랑하는 이와 눈을 마주했던 순간을 위해 연주했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순간, 한번뿐이었던 그 시간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는 매일 아침 아내와의 시간을 그리면서 연주했다. 음악으로라도 그때 그 아침을 다시는 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성공할 수 없다. 이미 사라져 버린 순간은 짙은 잔향만 남길뿐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이 진실을 마랭 마레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에게 음악은 애도의 언어가 아니라, 세상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수단이었다. 궁정에서 연주하면서 박수를 받고, 명성을 쌓고, 권력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그는 소리를 만들었다. 생트-콜롱브에게 음악이 사라진 시간을 붙잡는 시도였다면, 마랭 마레에게 음악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도구였다. 같은 악기를 연주했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정반대였다. 한 사람은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머물렀고, 다른 한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 걸어갔다.
과거 성공이라는 두 글자에만 꽂혀 있던 시절이 있다. 그 성공이 어떤 모습인지는 모르지만, 남들보다 앞서나가야 할 것만 같은 조바심에 휩싸여 있었다. 명절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여유도, 매년 피는 벚꽃을 보러 갈 이유도, 새해를 기다리는 설렘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효율과 손에 넣을 수 있는 결과뿐이었다. 그렇게 쉬지도 않고 열심히 달려갔다. 지금 돌아보면 나름 최선을 다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정작 당시 내가 무엇을 하고 다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오래전에 썼던 이력서, 일할 때 썼던 노트들, 휴대폰에 남아 있는 일정표와 통장 잔고, 이제는 열어보지 않는 이메일로만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이유에서 채울 수 없는 상실감을 경험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작품 속 마랭 마레와 생트-콜롱브도 소중한 것을 잃고도 음악으로만 그 부재를 메우려 했다. 지난날을 되돌리려는 하고, 궁정의 화려함과 귀족들의 찬사, 권력과 부로 허전함을 달래려 한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는 단순했다. 둘 다 지나간 여름은 돌아오지 않았고, 화려함은 예술적 갈망을 충족시켜주지 않았다.
작품을 소개할 때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짧은 문장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단순하지만 명료한 이 짧은 문장은 생트-콜롱브의 삶을 통해서 설명한다. 그는 완벽한 연주를 위해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했다. 자신의 음악이 녹음되거나 기록으로 남아 보존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은둔 생활을 고집했다. 그의 목표는 문장처럼 명료했다. 과거를 되살려 내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가 깨달은 것은 그가 연주하는 음악조차 오직 연주하는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연주가 끝나는 순간 음악은 영원히 사라진다는 진실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그가 선택했던 삶은 재현 불가능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매 순간순간 진심으로 임하는 것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상실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상실을 겪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하루를 바라보는 태도는 너무나도 다르다. 키냐르는 예술을 통해 이 차이를 설명한다. 연주하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음악으로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그렇기 때문에 뒤따라 오는 상실의 감각을 겹쳐 놓았다.
생트-콜롱브는 음악으로 슬픔을 달래려 하지만, 오히려 연주가 끝나고 소리가 사라질 때마다 그 덧없음을 더 깊이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허탈함 앞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침은 언제나 늘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매일을 한 톨의 후회도 남기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기억에는 남길 수 있는 작은 틈을 희망할 뿐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단 한 번뿐이라는 감각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상실을 견디는 동시에 진심을 다할 수 있는 작은 변화라는 생각이 든다.
※ 이미지: "Tous les matins du monde" by Christine BEAUFI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