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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근 Dec 16. 2024

시대의 일상은 명멸하는 권력보다 소중하다

2차 탄핵 표결 당일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국회 앞으로 모여든 시민들

일상을 되찾으려는 시민들의 거대한 물결



2차 탄핵 표결을 두어 시간 앞 둔 12월 14일 토요일 노량진 지하철역. 개찰구로 향하던 사람들의 행렬이 멈춰 섰다. 국회의사당행 승강장으로 너무 많은 승객이 몰린 것이다.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신호봉을 든 경찰들이 나와있었다. 언제 지하철을 탈 수 있을지 몰랐지만 시민들은 질서 있게 통제에 따랐다.


탄핵 표결 당일 국회로 가는 지하철로 환승하기 위해 시민들이 노량진역에서 기다리고 있다 / 박석순 제공


신길역행 지하철을 타도 국회로 갈 수 있다는 안내방송이 계속 흘러나왔다. 지도앱 기준, 하차 후 도보로 37분이 걸리는 우회로였다. 하지만 추세로 보아 곧 국회의사당 인근 역들을 무정차 통과하게 될 것 같았고, 일부 승객들은 안내 방송에 따라 신길역행 승강장으로 가기 위해 뒤돌아섰다.


신길역을 나오니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온 건지 신길역 뒤편 횡단보도와 길 건너 문화다리는 국회로 가는 행렬로 가득했다.


신길 지하철역에서 국회로 가는 시민들의 행렬이 횡단보도와 문화다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신길역에서 국회로 가는 시민들의 행렬이 문화다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국회로 향하는 시민들의 행렬은 서울교에서도 흘러와 여의도 교차로에서 하나의 인파를 이루었다. 사방에서 굽이 치는 인파는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거대한 물결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국회 앞으로 모여들며 거대한 물결을 이룬 시민들


일상이 무너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았다


그 날 밤 그 카톡을 받기 전까지 나는 내 일상의 소중함을 몰랐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었고, 과거의 나처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취약계층 노동자들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지만, 야간 근무를 수 년간 이어오고, 쳇바퀴 돌듯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지쳐있었다.


일을 마치고 귀가한 늦은 밤, 주차를 하고 보니 여러 개의 카톡방에서 메시지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하나의 메시지만 올라온 방을 클릭해보니 현직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되고 군대의 통제를 받으며 포고령을 어기면 처단 당하는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비상계엄을 선포할 요건도 아니었고, 비상계엄이 선포돼도 국회가 계엄을 해제할 권한을 갖고 있었지만, 뉴스 속에서는 경찰이 국회 출입을 봉쇄하고, 공수부대를 태운 헬기가 국회 주차장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늦은 저녁이라도 한 술 뜨려던 생각도 잊고, 큰 충격에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상이 눈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계엄이라는 국민적 트라우마, 불면의 일상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을 맞이한 후에도 우리 국민들은 16번이나 선포된 계엄 속에 억압 된 채 살아가야 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되찾고 서서히 민주화 되기 시작하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 1조 제 2항을 체감하는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제 계엄으로 인한 처절한 비극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소년이 온다>, 지난해 천만 관객을 돌파한 <서울의 봄>과 같은 소설과 영화 등을 통해서만 복기하는 것인줄 알았다. 그 누구도 2020년대에 공수부대를 태운 헬기가 국회 상공으로 날아오는 악몽 같은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는 어느 집회 참가자의 절규처럼 용감한 시민들의 합세로 국회가 무사히 계엄해제권을 행사한 이후에도 자다 깨면 혹시나 싶어 뉴스를 보는 불면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군 관련 회의 소집 속보가 뜨면 국민들의 가슴은 또 한 번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하면서도 2차 계엄에 대한 공포가 우리 사회에 만연했다.


비루하고 하찮고 무미건조한 것이 우리네 삶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일상을 총칼과 군홧발로 짓밟을 권리는 그 어떤 권력자에게도 없다. 국민 개개인이 이 나라의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그 원혼들을 어찌하려나


2024년에도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으니 이제 다시는 계엄이 없으리라고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은 유한하고 10년도 집권하지 못하고 평생을 숨어 살아야 했던 독재자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학살 명령을 부인했지만, 수감 중인 연쇄살인범이 밤마다 피해자 귀신들이 보인다고 자신에게 호소했다던 어느 교도관의 증언처럼, 그 역시 자기가 죽인 사람들의 원혼에 시달리지 않았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는가. 영화 <혈의 누>에서 만신이 무관에게 들려준 말처럼 말이다.


원혼이 구천을 떠도는 데 칼로 덮어둔다고 마냥 편안하시겠습니까.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종전이 임박하자 쉰들러는 자신의 유대인 노동자들을 공장으로 다 불러 모으고, 그 유대인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온 독일 군인들에게 "모두 여기 모여있잖아요. 지금이 기회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명령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 하는 독일 병사들에게 그들이 듣고 싶었던 말을 들려준다.


가족에게 돌아가세요. 살인자가 되지 마세요.


탄핵 가결 현장에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첫 걸음 


12월 14일 오후 5시 탄핵이 가결되자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은 축제를 벌이듯 '다시 만난 세계'와 '삐딱하게' 등의 K팝을 떼창하며 응원봉을 흔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K팝 그룹들과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고찰을 글로벌 스트림으로 끌어올린 K드라마 영화의 나라, 세계가 인정하는 문화 강국다운 모습이었다.


탄핵이 가결된 후 집회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질서 있게 되돌아가고 있다


K팝 세대들이 응원봉 축제를 즐기는 광경을 뿌듯하게 지켜보며 시민들이 다시 무리 지어 국회 앞을 빠져나갔다. 마침내 일상으로 돌아가는 첫 걸음을 뗀 것이다. 한 때는 광장의 주역이었으나 이제는 가정을 책임지고 노부모를 돌봐야 하는 나이가 된 시민들이 새로운 세대에게 광장의 뒷일을 맡기고 떠나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이 포스팅은 오마이뉴스에서 기사화되었습니다. 

https://v.daum.net/v/20241216105102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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