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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근 Dec 27. 2024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의기 - 영화 <하얼빈> 리뷰

어제 죽은 동지들에 빚진 독립운동가들의 처절한 작전을 담은 첩보 스릴러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장에 서서도 대한 독립을 위해 죽는다는 사실을 기뻐했다는 안중근은 대한제국 말기의 숭고한 군인이었다. 대한독립군의 장군 격인 참모 중장이었던 그는 하얼빈역에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초대 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함으로써 독립군의 의기를 보여주었다. 영화 <하얼빈>은 하얼빈까지 가는 안중근과 독립군 동지들의 험난한 여정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300억 대작이다.


영화 하얼빈 / 네이버 영화 포토


<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의 우민호 감독은 뛰어난 연출가다. 빈약한 서사로 실패한 <마약왕> 조차도 장면 장면의 연출은 곱씹는 맛이 있다.


<하얼빈>에서의 그는 비장했다. 간도의 독립운동가들과 그 시대의 공기와 한이 담긴 박경리의 <토지>를 읽으며 영화의 가닥을 잡았고, 배우들과 함께 극한의 바람과 눈을 가로지르고, 꽁꽁 언 영하 40도의 드넓은 얼음강 위와 진흙탕 속을 뒹굴며 영화를 만들어갔다.


네이버 영화 포토


흥행에 대한 염려에도 오락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거사를 치르기 위해 하얼빈까지 가는 여정 속 독립운동가들의 고독과 쓸쓸함, 고뇌와 의심을 진지하게 담으려 했다. 그들은 일본군을 피해 흩어졌다 약속된 밀실에 하나둘 다시 모이는 일을 반복한다. 밀정으로 인해 기습받고, 동지를 잃고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영화는 첩보 스릴러의 긴장감을 품는다.


주인공들이 죽음을 향해 비장하게 나아가는 순국 지사들이라는 점에서 한국적 느와르의 외피도 갖고 있다. 서사는 뜨겁게 들뜨지 않고 시종 냉정하고 묵직하게 흘러가지만, 그 고단한 여정을 따라가는 화면들은 빛과 어두움과 미장센으로 관객들의 뇌리에 한 폭의 그림처럼 각인된다.


네이버 영화 포토


이 영화의 미덕은 단연 숭고하게 되살려낸 안중근의 의기이다.

안중근은 원래 평화주의자였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도 대한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되찾으려는 의지를 만방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포로로 잡힌 일본군을 극중 이창섭(이동욱 분) 등 동지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만국공법에 따라 풀어주며 이제 그만 가족에게 돌아가라고 것도 그의 평화주의적 면모를 드러낸다.


반면 풀려난 일본군 육군 소좌는 열등한 조선인에게 목숨을 구제받았다는 생각에 안중근의 동료들을 기습하여 몰살하고 안중근을 집요하게 뒤쫓는다. 일본군 소좌는 그 과정에서 잡힌 이창섭에게 총을 겨누며 안중근이 어딨는지 말하면 죽이지는 않겠다고 한다. 이창섭은 안중근과 정반대의 사상을 가지고 가장 격렬하게 대립했었지만 일본군 소좌의 제안에는 코웃음을 친다. 일본군 소좌가 안중근을 그토록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지만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려는 이유는 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숭고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군 소좌를 바보새끼라고 비웃으며 기꺼이 그의 총에 죽는 길을 택한다.  


이처럼 동지들이 죽고 작전이 노출돼 거사가 좌절된 듯 보이자 독립군의 후원자가 되어주던 최재형은 혼자 돌아온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가는 걸 만류한다. 하지만 안중근은 죽은 동지들의 뜻을 이어받지 못할까,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는 않을까 두려워 오열한다. 이에 최재형 역시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데 그들은 어제 죽은 동지들에 빚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처절한 현실에도 치열하게 오늘을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네이버 영화 포토


안중근의 의기를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건 그가 그토록 가고자 했고 마침내 도달한 그 길의 끝에는 죽음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군중의 박수도, 물질적 보상도, 군의 수장이 되거나 권력을 쥐는 것도 아닌 차디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 뿐이었다. 민초들을 핍박하며 온갖 권력과 호사를 누리던 당대의 권력자들이 팔아먹은 나라를 되찾는 기약없는 길, "내년, 내후년, 10년, 100년까지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한 다음에라야 그만둘 것이"라는 그 길을 갈 내일의 동지들에게 한 이정표가 되고자 안중근은 자신의 삶을 기꺼이 죽음과 맞바꾸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1980년 5월의 광주와 2024년 12월의 국회 앞에서 무장한 군인들과 군용차량을 온몸으로 막아서던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 옛날 안중근이 그랬듯, 그 후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이 그랬듯 숭고하게 그 순간을 살아낸 것이다.

그들 어딘가에는 아마도 과거에 빚진 아름다운 마음이 숨어있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이자 518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시적 언어로 복기한 <소년이 온다>의 한강 작가는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확답했다. 국회에서 계엄군의 총구를 붙잡은 모습으로 BBC '2024년 가장 인상적인 사진' 중 하나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한 30대 여성 정치인도 유튜브 방송에서 과거 민주화 세대에게 빚을 졌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조선이란 나라는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 온 나라지만 저나라 백성들이 제일 골칫거리야.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


안중근과 동지들이 '이등'이라고 부르며 처단을 맹세했던 이등박문, 이토 히로부미는 영화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한다. 민초들을 핍박하며 온갖 권력과 호사를 누리는 당대의 권력자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숭고한 마음들이기에. 

그들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홀로 하얼빈역에서 외친 '코레아 우라(러시아어로 대한독립만세)' 지금도 많은 후대들의 귓가에 울리고 있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한다는 깨달음 역시도.


2017년 개봉하여 723만 명의 가슴을 울린 <1987>, 지난해 1312만 명의 관객을 모은 <서울의 봄> 등이 지금 광장을 형형색색으로 채우고 있는 2030 응원봉 세대에게 그들이 잘 몰랐던 과거를 생생히 알려줬었다.  

조국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고, 높은 문화의 힘을 한없이 가지게 하고 싶다김구 선생의 소원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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