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이 되던 해, 할머니의 품을 떠나 우리 집에 왔다. 참고 기다려 닿은 시공은 여전히 부모님 얼굴을 뵐 시간조차 빠듯하였다.
아버지는
새벽 별 보고 나가 밤 별 보고 들어오셨다.
시간이 지체되면 굳어지는 시멘트를 자식처럼 차에 싣고 여기저기 나르는 사람이셨다.하루 종일 바지단을 움켜잡고 있었던 고단한 양말과 날카롭게 굳어버린 돌가루 작업복을 말없이 벗어놓으셨다. 반면, 주말이면 트로트로 집안에 흥을 가득 채우는 DJ와 흐리멍덩한 어항을 선명하게 변신시키는 마술사가 되셨다. 그의 손길에 스킨답서스 넝쿨이 거실 벽과 천장을 푸릇하게 감쌌고 행복나무, 행운목, 켄차야쟈는 거실과 베란다를 조심스럽게 옮겨 다니며 감탄을 자아내는 자태를 뽐냈다. 술을 드시면 조금 서늘하게 변하셨지만 따듯한 그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 입학식을 다녀왔다. 엄마 같은 아버지다.
어머니도
모두가 잠든 순간에 일어나셔서 솥뚜껑 운전을 하셨다. 달그닥달그락 다섯 식구의 아침상 준비하고 넷의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보내고 31번 버스를 타고 시장에 가셨다. 시장에서 돌아오면 재료를 손질하고 주문 전화를 받고 아구찜을 비벼서 손수 배달을 하셨다. 정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때엔 철가방을 들고 버스나 택시를 타셨다. 매정한 육교가 들어선 뒤, 무단횡단도 자주 하셨다. 한 번은 도로로 나가 몸으로 차들을 세우시더니 아구찜 담은 봉지와 동호수 적힌 쪽지를 건네며 배달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 후로 배달이 들어오면 가게 문밖으로 발을 빼 달아나고 싶었지만 눈과 귀를 그녀를 향해 열어둘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 컴퓨터 학원을 다니더라도 선생님이 돈 값을 하지 못한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그만두었다. 아구찜 한 그릇에 만 오천 원이니, 아구찜을 몇 그릇 만들어 파는 고생을 해야 누릴 수 있는지 계산하는 애늙은이, 돈을 쏙 빨아가는 언니 오빠에게 잔소리하는 동생이었다.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는 좋은 방법은 뒤늦게 깨달았다.
“뭐 할라고 아는 이리 줄줄이 낳아가지고, 사는 게 왜 이리 미련스럽노? 니가 내 인생 다 망쳤다. 니 때문에 되는 게 없다. 뒈지삐라”
어머니를 탓하는 아버지의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 들었다.흔해서 가치 없는 나에게 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막내라 더 작아졌다. 외동인 친구들은 정말 고귀하게 보였다.
'만약에 결혼을 해 자식을 낳는다면 고귀한 수준에 머무르리라'
“니를 교장 하는 큰아버지 댁에 보냈으면 부족함 없이 잘 컷을 텐데. 큰어머니가 너를 탐낼 때 그냥 보내는 거였는데.”
불쑥 뱉어버린 말씀에 당장은 화가 났다. 정체불명의 유모와 할머니 손에서 자라남을 반추하고 되뇌었다.
'그래도 엄마가 나를 버리진 않으셨구나.'
부모님 가정은 이 넷째 때문에 거추장스럽고 단란하지 못해서 죄송했다.
'찰나의 부정적인 감정은 감추어 님의 눈에 들게 애쓰고 티끌의 방해도 되지 않는 어린이로 살어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