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밤 May 18. 2022

혼자노는기록 #38 , 뱅쇼 한 잔



혼자노는기록 # 38 뱅쇼 만들어 먹기



회식이 있었다.

누군가 중국의 8대명주라며 양하대곡을 가져왔고

맛만보겠다는 말은 고소한 삼겹살과 흥미진진한 이야기속에 묻혔다.

그 사이 허용치를 조금 넘게 알코올을 흡수해버렸다


자리가 파한 뒤 교대역의 기나긴 환승구간을 걷기 시작하자 술기운이 거하게 올라왔고

결국 사당역에 급하게 내려 쭈그려앉아 지하철 5대가 지나갈 동안 펑펑 울다 집에 갔다 .


30대가 넘고 내 주사가 우는 거라는 걸 처음 알게 된 수치스러운 밤이었다.

이젠 정신력으로 신체를 컨트롤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약해졌을까.>


새벽에 깨서 화장실 거울 속 퉁퉁부은 눈을 바라보며 청승맞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곧 그런 자기성찰적인 고민은 맨정신일 때 해도 별로 효율적이 못한데

굳이 알딸딸한 지금할 이유가 없음을 깨우치고 대신 냉장고를 뒤졌다.


몇주 전에 뱅쇼를 만들려다가 귀차니즘이 돋아서 만들기를 포기한 재료들이 눈에 띄었다.


향긋하고 뜨끈 달콤한 뱅쇼는 내가 몸이 약해진 것 같을 때 찾는 음료다.


오렌지와 계피향이 가득 담긴 따뜻한 한잔을 홀짝이다보면

가벼운 술기운과 함께 몸에 열이 돌고 그대로 전기장판으로 데워놓은 침대까지 더하면

아주 훈훈한 꿀잠을 잘 수 있기에 체력 회복에는 아주 그만이다.


술먹고 주정을 부린게 바로 어젠데 또 술이 들어간 음료를 생각하는 걸 보니

나도 어쩔수없는 주정뱅이같지만 어쩌겠나? 땡기는 걸!


베이킹소다로 오렌지 1개와 배 1개 그리고 건대추 5-6개를 박박 씻어

껍질채 슬라이스로 잘라 냄비에 넣는다.

집에 먹다 남은 편의점 스위트 와인을 몽땅 붓고 시나몬스틱 2개를 넣어

15분 정도 팔팔 끓이면 온 집안에 오렌지와 달큰한 계피향이 폴폴 풍긴다.

(정향과 팔각이라는 재료도 들어간다곤 하는데 특유의 향이 나와 맞지않아서 사지 않았다. 특히 정향은 치과를 연상시키는 냄새가 난다 ㅠㅠ)


국자로 뜨거운 뱅쇼를 퍼서 큰 유리컵에 담아 전기장판을 켜고 침대속에 들어가 호로록 마신다.

끓인 와인이라도 알코올이 약하게 남는지 한잔 다 마시면 볼에 슬그머니 열이 오르는게 느껴진다.

절로 눈이 스스륵 감긴다.

이불킥할 어젯밤의 부끄러움이 머릿속을 맴돌지만

뱅쇼 한 잔이 가져온 따스한 안도감에 남의 일인양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마음에 찰랑인다.


5월5일 어린이날.

엄마아빠손을 잡고 어린이대공원을 누비던 한 어린이는

20여년 뒤 뜨거운 와인으로 전날의 숙취를 해소하는 술꾼이 되었지만

스스로 데미지를 입혀도 스스로 힐링하는 법을 찾는,

나름 자가치료가 가능한 대견한 어른이 되었음에 한숨 놓으며

온종일 침대에 파묻힐 생각에 어린이 못지않게 신이 나는 어린이날을 보냈다.




tip)

배 1개 : 4,500원

오렌지 1개 : 1,500원

건대추 : 2,500원

통계피 100G : 2,500원

편의점 스위트 와인 (베어풋 스위트 레드) : 11,900원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노는기록 #37 , 홈요가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