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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당 Mar 23. 2021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에 온전히 진심을 담은

정세랑 작가의 <목소리를 드릴게요>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에 온전히 진심인 정세랑 작가의 2020년 Sci-fi 소설 <목소리를 드릴게요>

(어쩜 출판연도도 2020년인지)

<돌이킬 수 있는>을 읽고 따뜻한 sf 소설을 맞이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책으로 정세랑 작가의 이 첫 sf를 택하게 된 것 같다. 총 8개의 단편이 엮여 있는 sf 단편집이다. 단편 하나하나가 전달해주는 메시지와 나의 생각과 경험들이 잘 연결되면서 행복한 독서, 양방향 독서가 될 수 있었다.

단편이 끝나고 작품 해설 페이지가 나오는데, 이 8개의 단편을 하나의 책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었다.

정세랑 작가의 책은 저런 글꼴이 정말 잘 어울리는 책인 것 같다. 뭔가 부드럽고 모난 곳 없는 듯한 글꼴이랄까. “날카로운 비판조차 결 곱게 다듬은”이라고 표현된 것처럼, 작가의 한 문장 한 문장이 다 사랑스럽고 온유하다.

sf를 사랑하는 책 유튜버의 영상 봤는데, 그 작가님께서 sf는 가장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기에 그만큼 현실의 특정 부분을 상상력을 통해 집요하게 끌고 가는 장르라고 표현해주셨다. 이 책은 그런 현실적인 요소들을 끄집어내서 정세랑 작가가 사랑하는 것들과 아주 담백하게 버무려져 있다.


1.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

이 책의 물꼬를 트여주는 단편. 짧지만 아주 강렬하게 사랑을 표현해준다.

미래를 바라는 미싱 핑거와 미싱 핑거와의 과거를 바라는 점핑 걸.


2. 11분의 1

11분의 10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도 11분의 1을 선택한 건 온전히 그의 따스함 때문이 아녔을까. 그 어떤 최첨단의 과학으로도 그 따스함으로부터 오는 인간의 선택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3. 리셋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단편.

인간이 오염시켜버린 지구를 미래의 인간이 거대 지렁이를 풀어 리셋시킨다. 거대 지렁이는 플라스틱을 양분으로 삼아 인류 문명을 파괴한다. 그 자리에는 화학 비료가 없이도 비옥한 흙이 있고 백합향이 남았다. 그리고 인간은 본래 지렁이가 있던 지하, 땅 속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지상에는 온갖 동식물들이 활개 치며 살아간다.

리셋 이전의 과학이 인간의 효율을 위해 존재했다면, 리셋 이후의 세계에서 과학은 인간 외의 모든 것을 위해 가장 저효율을 유지하며 존재한다. 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최고 수준의 과학을 가지고 원시의 삶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앤, 모른 척해줘요. 지구(Earth)를 위해, 지렁이(Earthworm)를 위해”

리셋 후의 세계에서 바라보는 ‘재고’와 ‘밀집 사육’의 개념도 기억에 남는데 재고는 기분 나쁜 풍요로움, 밀집 사육은 인간만을 사랑하는 모습이라고 표현된다.


4. 모조 지구 혁명기

비극을 전시하는 곳엔 늘 사람들이 몰린다.

에버랜드가 자연 그대로의 지구 같고, 모조 지구가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과 과학의 산물이 담긴 지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이너가 천사에게 9개의 날개를 설계한 것처럼 그리고 9번의 고통을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지구의 다른 생명체들은 인간이라는 디자이너로 인해 이 모든 걸 감내해야 한다. 우리가 계속 이런 독단적인 디자이너로 남는다면, 언젠가 그 모든 화살은 우리에게 쏟아질 것이다. 지구는 비극의 현장을 담은 한낱 관광소로 남겠지.


5. 리틀 베이비 블루 필

“오용은 상식 바깥에서 이루어지는데, 말뜻이 무색하게도 상식의 안쪽보다 바깥쪽 영역이 광활하므로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좋았던 단편. 리틀 베이비 블루 필의 도래로 이를 오용하기도, 새로운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기도 하는 이런 격동과 적응의 과정을 정세랑 작가의 글을 통해 보면서, 흔한 말인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라’에서 ‘숲을 본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정세랑 작가님 정말 대단하신 것 같다.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3시간 동안의 기억을 온전히 가질 수 있게 만들어진 리틀 베이비 블루 필이 암기식 시험의 무효화, 영상 산업 가치의 하락, 고문, 교통사고 등을 유발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스마트폰이 생각이 났다. 일상의 편리함과 정보의 풍요를 가져온 스마트폰은 그런 이점을 가져온 동시에 운전 중 휴대폰 사용으로 인한 교통사고, 휴대폰 중독, 정보 유출, 포르노 산업 확대 등의 엄청난 부작용과 오용을 가져왔다. 이런 오용을 막기 위해 인간은 그에 맞게 적당한 수준의 해결책을 내놓는다. 그런 오용들과 해결책이 가져다주는 엄청난 변화들은 당연한 인간사에 해당되는 걸까. 우리는 그냥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아가지만, 그 시간을 줌 아웃해서 보면 이 책에서 묘사한 것처럼 너무 끔찍한데, 근데 또 우리는 그런 세계에서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

“강박적으로 정보 백업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불안해했다. 불안해하다가 계속 그 불안 속에 살 수 없어서 불안마저 놓아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대기업들이 하나의 국가가 되어 모든 이들의 모든 행적들을 감시하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의 결말이 이렇게 될 것만 같아 무섭다. 우리가 무료로 어떤 혜택을 받고 있다면, 그건 우리가 철저히 자본주의의 상품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생각이 났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패치를 선호했고, 일부의 사람들은 보조기억장치를 시작으로 신체 개조를 꺼리지 않게 되었다.”

스마트폰을 정말 우리 몸에 이식하는 세상이 올 것 같고, 그런 세상이 당연한 세대가 나타나겠지.

“잊지 않은 사람들과 잊어버린 사람들은 서로를 불신했다.”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받아들인 세대와 받아들이지 못한 세대 간의 격차가 결국 불신을 낳는 결과.​


“작은 하늘색 알약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동시에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6. 목소리를 드릴게요

최근 봤던 유 퀴즈 영상이 생각났다. 연쇄 살인율이 줄어든 건 연쇄 살인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연쇄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잡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무서웠던 건, 그래서 이런 잠재적 범죄자를 분별해내는 범죄 프로파일링과 과학적 수사 기법을 발전시켜나가고 있다는 것.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생각났는데, 범죄자를 예측하는 수사가 적용된 사회를 그리는 영화이다.

이 단편 소설은 주인공의 목소리가 폭력 인자를 가진 사람들을 각성시킨다는 이유로 그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는데, 평생을 수용소에서 지내거나 성대 제거술을 받는 것이다. 교사인 그가 가르친 학생 중 16명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유와 그와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이렇게 그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가 무서웠다. 특히, 연선의 등장이 더 공포스러웠는데 ‘착오’ 때문이다. 모든 게 착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사람의 인생은, 이 사람의 자유는, 이 사람이 가졌던 죄책감은...

그리고 그가 보여줬던 사랑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필이면 사랑이 일목 대상인 일목인처럼

물거품이 될 각오가 선 인어처럼.

‘목소리를 드릴게요’”

목소리를 잃더라도 다시 자유를 찾게 한 그것은 숭고한 사랑


7. 7교시

“그렇게 38억 년 진화의 결과물이 20세기와 21세기에 지워졌습니다. 인류는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다음에야 이 작은 행성의 가치를 다시 매겼던 것이다.”

이 세상의 시스템 붕괴가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하는 건 큰 착각인 것 같다. 지금 이대로라면 그 시스템은 붕괴될 것이고 그럼 우리 세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것일 뿐이지, 절대 파국이 아니다. 이미 많은 걸 놓친 후에 하는 늦은 후회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지금이라도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나방이나 노린재 같은, 날다람쥐보다 더 작고 보잘것없고 아름답지 않은 종을 위해서라도 어쩌면 인류가 정말 느린 자살을 택한 건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은 속죄일 것이다.”

“그것이 아라에게 거는 말이 아닐 지라도 아라는 존재감을 완전히 지우고 듣는 데에만 집중할 계획이었다.”

삶의 그리고 지구의 주체를 ‘인간’에서 ‘그 외의 모든 것’으로 바꾼 세상.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세상이란 거.

이 책이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에 쓰였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숲을 보는 자는 정말이지...


8.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따뜻한 좀비물.

가난이 좀비 시대의 생존 무기가 되었다는 게 슬프기도 했던,

그리고 목표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용기 있는지 잘 보여줬다.​


“정윤의 우주가 정지한다. 가끔은 심장마저 멎는 것 같다. 미세한 진동조차 용납되지 않기에 불수의근까지 배려해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시위를 놓을 때의 탄력적인 팔분음표, 화살이 날면서 내는 공기와의 멋진 마찰음”

양궁 하는 정윤을 표현한 글인데, 놀랍다 필력... 감탄밖에 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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