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인환 May 03. 2024

[육아] 도서인플루언서 아빠는 아이에게 어떻게 읽어주는

 '자기 결정 이론'이라고 있다. 자율성이 보장되는 환경에서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는 이론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네가 잘 생각해보고 결정해."

 무책임과 다르다. 부모로써 환경조성을 하되 결정은 아이가 한다.

매주 일요일이면 도서관에 간다. 환경을 조성하고 안에서 자유를 준다. 평소에는 먹지 못하게 하는 '라면'을 먹을 수 있게 해준다. 편의점에서 원하는 간식도 고를 수 있다.

 '책 읽어'가 아니다.

 '책 읽으면 사탕 줄께'가 아니다.

 '읽고 싶으면 읽고, 읽기 싫으면 읽지 않아도 돼'

그러나 도서관에서는 모두가 책을 읽고 있다. 그 공간에서 책을 읽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며 읽지 않는 건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조급함 없이 조용히 기다리면 아이는 어느새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다.

 아이의 책을 고를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

 교훈? 학습? 아니다. 재미다.

 사람은 '자유도'가 높은 쪽으로 자연스럽에 이끌린다. 딱딱한 정장보다는 편한 잠옷을 좋아하고 호텔보다는 집을 더 선호한다. 이유는 그것이 편하고 자유도가 높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재밌게 읽는 시사 뉴스에 '문해력 평가'라는 테스트를 준다면 아마 어른들도 뉴스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는 돈을 주고 노래를 부르고, 누구는 돈을 받고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다르지 않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돈을 받으며 하는 일보다, 돈을 주며 하는 일을 더 좋아한다. 그 이유는 '자유도의 유무' 때문이다.

 돈을 받는 순간, 자유도는 사라진다. 돈의 주인에게 '속박'된다. 돈을 주는 순간, 자유도는 올라간다. 돈의 주인으로써 마음껏 할 수 있다.

 노래방에 돈을 내고 들어간 사람은 중간에 그만 둘 수 있다.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를 수 있고 반주를 켜놓고 다른 노래를 불러도 된다. 돈을 받은 사람은 그만 둘 수 없다.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를 수도 없고 정해진 노래만 불러야 한다.

 같은 행위가 누군가에게 노동이 되고 누군가에게 자유가 되는 이유는 그것의 자유도 때문이다. 돈을 받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도 돈을 지불하고 노래방에 간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는 행위'가 아니라 '자유도'를 사는 것이다.

 아이에게 책을 읽으면 주는 보상은 결국 자유도를 빼앗는 일이다. 아이에게 자유도를 주고 싶다면 책을 읽을 때, 보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일 자체가 자유로워야 한다. 읽다가 덮어도 괜찮다. 소리내어 읽어도 된다.

 읽은책을 또 읽어도 되고, 무서운 책이나 판타지 소설을 읽어도 된다. 그러나 반드시 스스로 정해야 한다. 다만 통제가 아니라 리드를 해 나가야 한다.

 가령 줄글 책을 읽어 줄 때는 재밌게 읽어주다가, 만화책을 읽어 달라고 하면 '만화책은 읽어주고 싶지 않아!'라고 말한다. 아이에게 '만화는 읽지마!'가 아니다. 그러면 아이는 선택한다.

 아이가 대부분의 책을 고르면 그중 몇 권을 교훈적인 책으로 섞는다. 그러나 강제로 읽게 하진 않는다. 그저 아이가 놀 때, 슬쩍 그 책에서 흥미로워 보이는 부분을 펴서 옆에 둔다.

 아이의 책을 고를 때는 아이와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해 본다.

 가령 아이가 학교에서 '딸기박물관'을 갔다고 하면, 슬쩍하고 딸기에 관한 책을 대여한다. 아이가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거야?'라고 물으면 슬쩍 진화에 관한 책을 빌려온다.

 아이가 읽었던 책 중 흥미로워 하는 책은 '원서'로 산다. 내용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원서로 구매해도 충분히 흥미롭게 구매 할 수 있다. '작가'가 외국 사람임을 알려주고, 필터 없는 작가의 목소리를 읽는 감성을 말해준다.

 간식을 철저하게 통제한다. 맛있는 초콜릿과 과자는 눈에 잘 띄는 곳에 둔다. 그리고 간식은 무조건 독서 중에만 허락한다. 스마트폰은 반드시 '영어'만 가능하다. '스마트폰'에 관한 그 어떤 통제에도 예외는 없음을 단단히 일러둔다.

 마음이 약해 질 여지가 전혀 없음을 확고하게 하고, 언급만으로도 매우 불쾌하다는 듯 말한다. '스마트폰'이라는 단어를 '마약'으로 바꾸어 감정을 이입한다.

 참도록 하지 말고, 아예 모르는 편이 낫다. 우리집에는 충전선이 없다. 충전선은 세탁실에만 있다. 아이가 잠들면 몰래 서서 겨우 메신저를 확인한다. 다시 세탁실에 두고 온다. 아이는 스마트폰의 존재를 집에서는 보지 못한다.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밖에 두고 왔다고 말한다. 아예 그 존재가 잊혀지도록 보여주지 않는다.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햇수로 6년이 넘는다. 3살이던 아이가 8살이 됐다. 생각해보면 길면서도 짧은 시기다. 간혹 6년 전에 썼던 글로 유입되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이 글도 누군가에게는 6년이나 지난 글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우리 아이는 14살의 중학생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떤 교육철학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교육철학을 가지고 앞으로의 6년을 살아갈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거의 3~4시간 씩 아이의 책을 읽어줄 것이고 8살에는 하루 10권씩 읽어 줄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꾸준히 기록할 것이다.

 아이의 교육에 '독서'는 처음이자 끝이다.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지 않고 환경만 조성하고 자유도를 높였을 때,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이 블로그는 그런 변화의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기록의 장이 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 어떤 간접경험은 직접경험보다 낫다_마지막 거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