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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Nov 15. 2024

[인문] 예외성이 최소화되면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다_불

 아이와 자전거를 사러 간 날, 자전거에 달린 보조바퀴를 언제 떼야 할 지 물었다. 그러자 사장님은 답했다. 

"아이가 알아서 떼달라고 할 거에요."

 보조 바퀴는 아이가 안전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돕는다. 다만 자전거에 능숙해지면 비로소 방해물이 된다. 속도와 자유로운 주행을 위해 보조 바퀴는 방해 요소다.

 최소한 안전을 위해 '보조바퀴'를 달고 시작하지만 언제까지 그것을 달고 있을 수는 없다.

 보조 바퀴는 '안정성'을 뜻한다. 안정성은 말그대로 '안전'하게 지켜준다. 다만 그것은 자전거 본질의 역할을 못하도록 마는 방해물이다. 두발 자전거는 패달을 밟지 않으면 옆으로 넘어지지만 속도를 높이면 네발자전거보다 더 안전하게 우뚝 선다.

 불확실성은 이처럼 두발자전거와 같다. 불확실성을 기꺼이 감수하면 그때서야 자율성이 보장된다. 아이의 자전거만 그런 것이 아니다. 불확실성은 예외성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불확실성'은 '성장'의 동력으로 작동한다. 비로소 안전 지대를 벗어나야 성장이 시작된다.

 세 아이의 엄마이자 하이테크 분야에서 성공한 CEO인 인스라엘의 작가 인발 아리엘리는 자신의 책, '후츠파'를 통해 이스라엘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자립성'이라고 했다.

 자립성은 '자기 확신'에 큰 도움을 준다. 부모의 감독 없이 목표를 실행하도록 하는 '자립성 허용'은 아이를 성장시킨다. '자립성이 허용'되면 아이는 실수를 통해서 배운다. 우발성을 터득한다. 우발성은 난관을 뚫고 나갈 기술과 전략을 갖도록 한다. 이런 우발성은 예기치 않게 우연히 발생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계'나 '확실성', '안정성'이 걷혀야 한다.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머리를 가눌 수 있는 순간부터 두려움이나 속박없이 주변을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도록 놔둔다. 제약을 최소화하고 체계를 없앤다. 이러한 무질서 상태를 히브리어로 '발라간'이라 한다. 이는 쉽게 말하면 아이에게 거의 모든 권한을 주고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놀이터에 아이와 함께 가면 미끄럼틀을 타는 방법이나 그네, 시소 타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아이가 스스로 터득할 때까지 지켜본다. 기구 타는 방법이 통상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바로 잡지 않는다. 이런 어른의 관용은 아이가 예측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한다. 그러한 상황에 놓인 아이는  대처할 수 있는 기술을 스스로 기르게 한다. 그렇게 길러진 기술이 스스로를 학습시키고 가르친다. 결국 아이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자신을 믿고 하고자 하는 바를 자신있게 해 나간다.

 체계는 예외성을 최소화하는 일이다. 테일러리즘이나 포디즘은 현대 산업사회의 대표적 관리법이다. 바퀴에 나사를 조이는 사람은 나사만 조이면 된다. 페인트를 칠하는 사람은 페인트만 칠하면 되고, 문을 다는 사람은 문만 달면 된다. 전체의 과정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필요가 없다. 그저 컨베이어벨트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 하면 그만이다. 이런 작업 환경은 당연히 '창의성'이 필요없다.

 흔히 말해서 '맥도날드'에서 빵과 고기를 잘 굽는 사람이 '맥도날드 CEO'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지위적으로 높아질수록 불확실성을 맞이 하게 된다. 인간의 기본 심리가 '불확실성'을 회피하는 것이다보니, '회사를 운영한다는 불확실성'보다 주어진 부품을 매일 같이 조이며 월급 받는 확실성을 택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확실성은 기초체력을 약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불확실성의 환경에 노출된 이들은 안정적인 삶을 살고, 확실성에 노출된 이들은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된다.

 예외성이 최소화 된 일에 사람은 고민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기계처럼 반복할 뿐이다. 이처럼 최소화 된 생각과 기계적 반복은 말그대로 '기계로 대체' 가능하다. 부품처럼 다른 사람으로 대체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측 불가능한 일을 능숙하게 대처하는 이들은 '직관'을 갖고 살아간다. 이 직관은 '대체불가능함'이 된다.

 대중의 심리는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고로 우리는 슈퍼히어로에 열광하고 음모론을 확신한다. 이런 사람이 많은 탓에 사회는 기업가보다는 노동자가 많고 리더보다는 팔로워가 많다.

 무엇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둘은 각각의 가치관에 따라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불확실성에 노출된 이들이 되려 확실성을 갖게 되고, 확실성을 가진 이들이 불확실성을 갖게 된다는 아이러니다.

 얼마전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대선에서 승리했다. 워렌버핏은 가진 자산을 현금화하고 있으며 금이나 비트코인의 가격이 상승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더 불확실성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과거 농사처럼 어느정도 분명한 주기와 확실성을 갖던 시기를 벗어나 이제는 '불확실성'과 함께 살아야하는 시대가 왔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가. 여러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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