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도, 도망쳐엇!'
수강 신청에 실패해서 듣던 교양 수업에서, 새로운 팀 프로젝트 설명을 듣던 나의 마음이 외쳤다. 스위스에서의 대학 생활 n 년차, 그간 참고 보낸 세월이 무색하도록 도망치고 싶은 프로젝트를 만났다. 팀원들은 죄다 타과 학생들이었고 아는 얼굴은 아무도 없었다.
반응형 웹사이트를 만드는 것이 프로젝트의 주제였는데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교수님들이 지정해준 특정 웹사이트와 리소스만 사용해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울상이었던 내 얼굴을 보고 팀원 중 누군가 비슷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K-컬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그 친구의 이름은 레나(가명)였다. 알고 보니 나와 똑같이 수강신청에 실패해서 그 수업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비협조적이었던 다른 팀원들과는 달리, 그녀는 팀 프로젝트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행위와 그것을 보고도 모른 척하는 교수님들에 진심으로 분노했다.
스위스에서는 쥐 죽은 듯 조용히 살아야 하는데, 자신이 그런 성격이 아니라 늘 괴짜로 살았다는 레나. 그녀는 어쩌면 가장 지옥 같을 수 있었던 팀 프로젝트에서 내 손을 잡고 같이 도망쳐 준 사람이었다. 아직도 그 친구가 웃으며 해준 말이 생생히 기억난다.
"이 프로젝트 이미 망한 것 같은데, 이왕 망한 거 더 재밌게 망쳐보는 게 어때?"
늘 꾸역꾸역 참아가며 워커홀릭처럼 죽어라고 일만 하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레나를 쳐다봤는데, 그때는 그녀를 눈앞에 두고도 알지 못했다. 그 희한한 제안을 한 사람이 지금까지도 매주 연락을 하고 지내는 인생 친구가 될 거라는 사실을.
그 프로젝트에서 나는 레나의 손을 잡고 인생의 도전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악몽 같은 프로젝트에서 '도망쳐 나오기로' 했다. 다른 팀원들이 우리에게 일을 미루었던 만큼, 일탈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보란 듯이 웹 사이트를 아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심지어 심혈을 기울여서 효과음까지 넣었다.
드디어 프레젠테이션이 있던 날, 우리는 아주 자랑스러운 태도로 열정적인 발표를 진행했다. 장난이라기에는 너무 진지했기에 교수님들은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으셨다. 결국 우리의 프로젝트는 대리만족을 느낀 학생들에 의해 최고의 프레젠테이션으로 뽑혀서 엄청난 박수갈채를 받았다. (물론 점수는 형편없었지만.)
그때 느꼈던 카타르시스는 아마 평생의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프로젝트는 망쳤지만 어쩐지 구원받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느낌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 아마 그때 내 인생에서 필요했던 것은 바로 그런 웃음이었으리라. 그때 나는 레나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다.
'늘 반복되는 팀 프로젝트의 끔찍한 루틴에서 벗어나도록, 함께 손 잡고 도망쳐준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그 경험은 고스란히 보리얀의 이야기로 옮겨 갔다.
보리얀과 같은 견습 목장에 다니게 된 루딘은 보리얀의 '아빠 친구 아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잘난 '엄친아'나 '아친아'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아래는 루딘이 견습 목장에 온 첫날에 일어난 일인데, 아이들은 릴테라 선생으로부터 '미블'이라는 희한한 공처럼 생긴 새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 갑자기 보리얀의 머리 위로 미블 한 마리가 푸다닥거리며 떨어진다.
“으앗!”
놀란 보리얀이 떨어지는 미블을 얼른 받아 들고, 주위를 살핀다. 뒤에 앉은 녀석들이 실실 웃고 있다. 그중 한 아이가 빈정거리며 말한다.
“야, 까마귀. 뭘 쳐다보냐? 시꺼먼 게 딱 네 친구 같아서 줬는데.”
아이들이 키득키득거린다. 보리얀은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린다. 엉겁결에 보리얀의 손에 들리게 된 미블 두 마리가 서로를 멀뚱 거리며 쳐다본다. 보리얀은 조심스럽게 동물들을 다시 마당에 놓아준다. 그러자 루딘이 뒤의 아이들을 돌아보고 묻는다.
“너네 아까부터 계속 그러던데, 보리얀이 왜 까마귀랑 친구야?”
“보면 모르냐? 저주받은 루에린이잖아. 저 징그러운 머리색 좀 봐.”
뒤에 앉은 아이가 말하자, 주변의 아이들이 따라서 킥킥 웃는다. 루딘은 잠시 두 눈을 끔뻑인다. 그리고 하찮다는 듯 짧은 대답을 내뱉는다.
“···아하.”
루딘은 보리얀에게 미블을 던진 아이 둘을 잠시 쳐다본다. 그리고 갑자기 두 아이의 머리통을 양손에 하나씩 잡아들더니, 둘의 머리를 서로 쾅 박아버린다. 두 머리가 부딪히며 돌덩이가 쪼개지는 것 같은 큰 소리가 울려 퍼진다.
“꽝-!”
순간, 소란스럽던 견습 목장에 정적이 흐른다. 머리를 박힌 두 아이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더니, 곧이어 고통이 밀려오는지 각자의 머리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린다. 루딘은 그런 그들에게 싱긋 웃으면서 말한다.
“나도 너네 둘이 친구 같아서 그런 거야. 서로 머리색도 똑같고, 머릿속에 든 것도 똑같네.”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은 릴테라가 날카롭게 외친다.
“이게 무슨 일이야? 루딘, 보리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루딘은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차가운 정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릴테라를 직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저기요, 릴테라 님. 제가 아침서부터 봤는데, 저 애들이 계속 보리얀을 괴롭히는데도 한 번도 뭐라고 안 하시네요. 심지어 몇 번은 애들을 따라 몰래 웃기까지 하는 거, 저 다 들었어요. 제가 귀가 좀 좋거든요.”
“······!”
예상치 못한 상황에 릴테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런 그녀를 무시하는 듯, 루딘은 은색 속눈썹 사이로 보리얀을 보며 묻는다.
“야, 여기 진짜 별로다. 난 다른 데로 갈 거야. 같이 갈래?”
보리얀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그래.”
보리얀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루딘과 함께 마당을 가로질러 간다. 아이들은 멍하니 이 광경을 쳐다보고, 릴테라는 너무도 기가 막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보리얀과 함께 목장을 나서려던 루딘은, 유독 자신을 빤하게 쳐다보고 있는 한 아이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아, 참. 너, 아까 나보고 잘 생겼댔지? 근데 나 성격은 별로 안 잘생겼어. 우리 아빠 닮았거든.”
루딘을 쳐다보던 아이가 마른침을 삼키고 엉거주춤 뒤로 물러난다. 주변의 다른 아이들도 아무 말없이 루딘과 보리얀을 피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을 따라, 두 아이는 유유히 목장의 울타리를 떠난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 나오는 대사다. 어쪄면 루딘은 어떻게든 아이들 사이에서 적응하고 살아가려는 보리얀의 인생을 망치러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리안이 용기 내어 그의 손을 잡고 뛰쳐나갔던 순간,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던 매일매일의 생활과 작별하게 되었다.
나를 위해주는 척, 번지르르한 말은 앞서지만 행동은 늘 실망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에 대한 기대와 믿음은 세월만 허비하게 만든다. 진정한 친구는 내가 힘든 상황에 있을 때, 내 손을 잡고 함께 '도망쳐 나올' 용기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아닐까?
애석하게도 인생에서 그런 친구를 찾기가 쉽지는 않다. 첫날부터 강한 인상을 남긴 루딘과는 다르게, 그런 '찐친구'가 될 만한 사람들은 은근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친구 하나쯤을 갖고 싶어하고, 또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럼 진정한 인생 친구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 인연을 잘 이어가는 것이라는데···.
다음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