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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연필 Sep 08. 2024

별의별 詩점

02 수평의 어제와 수직의 오늘

                                                                                           *

  하도 익은 아스팔트가 녹진한 여름 진액을 쏟아내는 통에 덩달아 질퍽거렸다. 그나마 열기가 닿지 못하는 지하터널로 숨어들기 바빴다.

  그사이 바람결이 바뀌고, 땅 위에 일렁이던 아지랑이들도 잦아들었다. 그래선지 여름내 숨어들던 지하터널이 영 미지근했다. 가능한 한 길게 건너던 터널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가볍기 짝이 없기는.

이렇게 종종 나는 내게 나를 수시로 들킨다. ‘문체부 바탕체’ 앞에서도 그랬다. 오랜 세월 10 폰트의 ‘문체부 바탕체’를 퍽 아꼈다. 한데 그날따라 유독 폰트가 둔하게 느껴져 포인트를 1포인트 작게 줄였다.

 '아니 그런데 웬걸! '

 9포인트 ‘문체부 바탕체’로 바뀌자 충돌을 일으킨 문장의 공기들이 허둥거리는 게다. 글자를 꿰고 있던 실이 끊어져 버린 듯, 미아가 된 문장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단 한 줄도 퇴고가 불가능했다. 서둘러 포인트를 되돌려놓았다. 그러고도 한동안 위태롭고 아찔한 마음이 계속되었다.

  지하터널의 공기도 여전하고, 문체부 바탕체도 그대로인데, 도대체 뭐가 문제라고 이리 유난인지. 언제나 지랄 맞은 변덕은 나로부터 비롯되는 구나. 쪽팔리며 맞이하는 가을이라니…흐흐



*

  그래도 명색이 가을인데 코 빠뜨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부실한 나를 마주한 게 어디 한두 번도 아니고. 이럴 땐 모르는 척 시치미 떼고 여전한 것에 슬쩍 나를 올려두면 된다. 나를 보고 있을 가을 앞에 뒤통수는 조금 따갑겠지만. 그럴수록 눈 질끈 감고 뻔뻔함을 시전해야 한다.


  나이 들수록 마음이 찌그러지지 않도록 발악하는 요령만 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네 도서관에서는 ‘런던 문학기행’ 강좌가 한창이다. 여름에 시작된 런던 기행이 가을에 이르렀다. 그 덕에 매주 목요일 공포스러운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고도, 런던에 오갈 수 있었다. 시차보다 놀라운 시대적 차이 없음은 겪으면 겪을수록 경이로운 충격이었다.



*

  이번주는 ‘T.S 엘리엇’과 만나기로 했다. 엘리엇은 약속 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그런데 엘리엇 혼자가 아니었다. 엘리엇의 시 ‘황무지’를 손에 쥐고 있는 건 ‘에즈라 파운드’였다.  파운드의 찻잔에 홍차를 따르며 무심하게 엘리엇이 말했다.


  “에즈라 파운드가 없었더라면 황무지도 없었어.”

  

  ‘네가 없었더라면 나도 없었다.’는 엘리엇의 고백이 무심해서 더 붉었다. 거침없이 나를 퇴고해 주는 무심해 다정한 나의 이들을 떠올리자 속이 울렁거렸다.



*

  런던 여정을 함께 한 일행이 전시를 제안했다. 출국 수속을 마친 일행들은 콩나물 가득한 한국의 밥상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한국 최초 여성 조경가 정영선의 반세기에 걸친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개인전이었다.     

“조경이라는 작업은 무엇을 만들고 생성하는 창작 이전에 ‘관계를 다듬고 설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정영선의 정원은 땅의 생김새와 성격에 부합하는 바라봄의 경험, 경치를 조망해 가는 수행적 요소에 가치를 둔다. 이는 자연의 아름다운 국면을 읽어내고 나와 관계 맺게 하는 차경(借景)의 원리, 곧 경치를 빌려오는 정원의 중요한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 중에서
'정영선 :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엘리엇에서 정영선으로 목요일의 오후가 자연스레 기우는 중이다.



*

이즈음 내내 ’가로의 하연과 세로의 하연‘이라는 화두가 내 안을 둥둥 떠다녔다.


때로는 수직, 때로는 수평, 모두 나.

영 다른 발화와 형태인 듯 보이지만 반복된 교차가 쌓여 나만의 짜임을 완성.

오랜 시간 직각으로 교차된 누적된 지층.

그러다 어느 날 내가 짠, 무심한 피륙을 마주한다.

나의 오늘은 나의 짜임.

내가 빚은 나라는 옷감.

나만의 질감. 나만의 굵기. 나만의 색

내가 짠 옷감으로, 무언가를 지어 입은 나, 입을 나.

마침내 여러 형태의 내가 피고 지기를 반복.

치열하지 못해 성긴 짜임마저도 나.     

  

   망상인지 분열인지 알 수 없는 사유들이 세포 분열하듯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언제부턴가 골똘히 떠오른 사유들은 끝내 나를 그곳에 끌어다 놓곤 했으니.

그날도 그랬다. 씨실과 날실로 가동되던 공장의 기계음이 미술관 중정에서 일제히 멈춰 섰다.



*

  보고 듣고 마주한 일상은 오늘의 나로 재현된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다. 쪼그려 앉아 꽃을 주억거리는 아버지라는 풍경을 일상으로 마주한 조경가 정영선. 그녀의 뿌리는 그 시절에 심어진 것일 터. 그러니 ’오늘의 나‘는 그 뿌리의 기원을 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일 테다.

  ‘꽃, 마당, 아버지, 시’ 흙빛의 서정과 서사가 수직으로 땅에 뿌리를 내리는 동안. ‘한국 최초의 여성 조경가’가 된 정영선 님은 자신을 수평으로 기다랗게 잡아 늘였다. 단단한 유년 시절이 끝내 다정한 조경자로 이끈 것이다.

  

  단단한 뿌리를 지닌 사람이 부여받은 사회적 타이틀은 가지를 피우고 열매를 맺는 다정한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었다. 어떤 의사, 어떤 선생님, 이 ‘어떤’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자격은 어쩌면 ‘이미 지닌 체 나야 하는 것인가?’ 하는 절망적인 결론의 봉우리에 함부로 이르고 싶어 지니, 이를 어쩌나... ‘어떤’ 없이 달랑 명사만 들고도 외로운 줄 모르는 삶을 도닥인다. 일렁이는 연민일랑 깊이깊이 넣어 둬야겠지.     


  팔십이 넘은 정영선 님의 인터뷰 영상이 곳곳에 드리웠다. 막 갈아 끼운 육십 촉 알전구 같다. 여전한 필라멘트가 또렷또렷 굽히지 않은 그녀의 세계에 대한 예민함인 양 짱짱히 반짝인다.   

  



*


무심하고 담담한 나의 광력에게
-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전시에 부쳐     
                                                                                                                                                       하연

‘에즈라 파운드가 없었더라면 황무지도 없었어.’라는
엘리엇의 담담한 고백을 들은 날
네가 없었더라면 없었을 나를 떠올렸어.  

꽃이 피자 비로소 마당이 피어났던 그날처럼
피어나는 마당이 없었더라면 마당을 피우는 이
없었더라면, 없었을 나를 떠올렸지.

가꾸는, 나를 가꾼 이들을 위하여
꾸밈없이 나의 마당을 맡고 핥고 쓰다듬기로.
무심과 담담이 순하게 드나드는 나의 마당이     

떠나는 마당으로
이렇게 된 마당으로, 마침내
무사히 이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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