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주인공이 되는 건 익숙합니다
본 글에 사용된 학교명, 이름 등은 모두 가명이며 실제 학교 및 인물과 관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대한민국의 한 여자고등학교.
여기 늘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온 한 학생이 있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이 그냥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
박현지. 체육복에 박힌 이름 석 글자마저도 평범한 사람.
늘 가십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고 멀찍이서 듣기나 하던 학생이다.
그런 현지가 뜬금없이 한 학교를 도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솔직해서 거짓말도 못 하고 본인을 숨기지도 못해서 였을까?
소문이 한 반을 넘어갈 때쯤 현지를 지칭하는 말이 생겼다.
2학년에 키 크고 머리 짧은 언니/애.
유독 키가 크고 여고에서 흔하지 않은 짧은 숏컷이라 늘 눈에 띄었다.
'2학년 그 키 크고 머리 짧은 애'로 알게 모르게 지칭되던 현지는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2학년에 키 크고 머리 짧은 걔, 3학년이랑 사귀는데 다른 학교 애랑 바람을 피웠대.”
“우리 학년에 누구 알지? 걔가 2학년에 키 크고 머리 짧은 언니랑 사귀다가 헤어졌는데, 그 언니가 바로 다른 사람으로 환승했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소문들이 학교 사람들의 입 구석구석을 훑고 다녔다.
그런 현지와 현지의 친구들은 소문에 느렸다.
관심이 없기도 했고, 소문을 듣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얘기를 듣게된 친구가 전해준 덕에, 현지도 본인에 관한 헛소문이 학교를 돌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때 현지는 담담히. 다른 반응을 보이지도, 어떠한 액션을 취하지도 않았다.
학교를 10년째 다니면서 경험했지만, 소문은 당사자든 누구든 나선다고 해결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겠거니 하고 넘겼다.
애초에 그런 성격이어서 소문 자체를 신경 쓰지도 않았다.
비유하자면 현지에게 소문은 해를 입히지는 않지만 거슬리는 날벌레에 가까웠다.
귀찮아서 그냥 방치해두는 것에 가까운…
그렇게 듣지도 말하지도 않은 채로 3학년이 되었다.
3학년이 되고 달라진 거라곤 현지를 지칭하는 말밖에 없었다.
3학년에 키 크고 머리 짧은 언니/애.
현지는 3학년이 되면서 다른 지역에 있는 학원에 다니느라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소문은 더 빠르게 돌았다.
현지는 입시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바빠서, 소문 따위에 신경 쓸 정신도 없다며 열심히 무시했다.
하지만 해결하지 않고 묻어두면 언젠가는 터지는 일이 있다.
이 소문이 그랬다.
결국 일이 터졌다.
전날 다른 지역에 있는 학원에 다녀와 피곤했던 현지는 친구가 빵을 사러 가자는 말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매점에 갔고, 전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해서 친구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이 바글바글한 매점에서 현지를 눈치 못 챈 건지, 현지 앞에 있던 2학년이 운을 떼었다.
“3학년에 키 크고 머리 짧은 언니 알지, 민정이랑 사귀었던…”
“그 언니가 왜?”
“민정이랑 헤어지고 나서 정원여고 2학년한테 환승했는데 민정이랑 사귀는 와중에 만나고 있었대.”
여기까지 대화가 이어졌을 때, 같이 있던 친구가 소리를 질렀다.
현지가 말릴 겨를도 없이 친구가 2학년들에게 화를 냈고, 2학년들은 울었고, 현지는 당황하다가 친구를 말렸다.
화를 내던 친구가 말리는 현지에게 소리쳤다.
“너는 니 헛소문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데 화도 안 나냐?”
현지는 멍해졌다.
멍하니 있던 현지와, 화를 내는 친구, 우는 2학년들의 소란에 학생주임 선생님이 매점으로 오셨다.
화가 잔뜩 난 친구와 우는 2학년들 대신에 제일 멀쩡해 보이는 현지에게 선생님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질문에 현지는 그냥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학교 안에서 저에 대한 헛소문이 도는 것 같은데 2학년들이 그 소문을 얘기했고… 그래서 친구가 저 대신 화내준 거예요.”
선생님은 2학년들에게 사과하라고 지시했고, 현지는 찝찝한 사과를 무심히 받았다.
교무실 내의 상담실에서, 선생님은 학생과 친구를 앉혀두고 무슨 소문이 도냐고 물어보았다.
현지는 자신의 성적 지향과 관련이 있는 소문이어서 말하기가 꺼려져서,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그냥 헛소문이고… 저를 욕하는 내용이 있었어요.”
선생님은 알겠다고 했고, 현지와 친구는 교무실을 나섰다.
그 사건 이후, 현지는 소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친구가 소리치는 게 머리에서 계속 맴돌았다.
내 일인데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본인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이 일이 있기 전엔, 현지는 소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소문이란 건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드니까,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현지가 겪은 소문이란 건 시간이 흐른다고 스스로가 노력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지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수시접수가 코 앞이었고, 졸업이 얼마 안 남았고, 괜한 곳에 쓸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현지는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잠들어버렸다.
다음 날, 교내 스피커로 현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3학년 5반 박현지, 3학년 5반 박현지. 지금 3학년 교무실로 오길 바랍니다.”
현지는 어제 일을 말씀하시겠거니 하며, 별생각 없이 교무실로 들어섰다.
학생주임 선생님은 기다린 듯 현지를 교무실 소파에 앉히고 냉장고에 있던 음료수를 하나 꺼내주셨다.
선생님은 성적이나 수시 같은 시덥잖은 얘기를 하시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현지야, 혹시 어제 2학년들을 처벌하거나… 학폭위를 열고 싶다거나, 그러니?”
순간 생각했다.
현지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수시 원서접수와 수능을 앞둔 학교와 선생님들은 너무 바빴고, 쓸데 없는 곳에 신경 쓸 정신이 있으면 모의고사 한 회, 영어단어 한 단어라도 외우라는 사람들의 말에 마음속에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대답했다.
“아니요, 그 2학년들이 제 소문을 제일 먼저 퍼뜨린 사람도 아닐 테고… 곧 수시잖아요.”
선생님은 그럼 네 뜻에 따르자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이후에 시간이 정말 정신 없이 흘러갔다.
어느새 수능이 끝나있었다.
1년간 현지를 귀찮게 한 소문은 수시 원서를 쓸 무렵에 사라졌다.
현지는 허무하면서도 후련했다.
소문은 사라졌고, 현지도 이제 더는 학교에 올 일이 없으니.
졸업 가운을 받고 학사모를 쓰고 졸업장을 받은 현지는 그렇게 학교를 떠났다.
현지의 소문은 학교를 떠남으로써 종결된 것일까?
현지의 소문은 현지의 이야기였지만, 그 안에 진짜 현지는 없었다.
현지가 어디서 무엇을 해도 현지의 소문은 사라지지 않고 '키 크고 머리 짧은 애'로 존재할 거다.
소문의 주인공이 되는 건 그런 일인가. 주인공이 사라져도, 소문은 남는다.
현지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다른 학교에서, 다른 곳에서 소문은 계속될 것이다.
글쓴이
문제없는 스튜디오 SNS에디터 실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