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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 Nov 15. 2024

사람 살리는 가짜

이야기 사랑하지 않는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핳"

그녀가 배를 들썩이며 목젖이 드러나도록 웃는다. 10초마다 벼락같은 웃음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운다. 그녀의 웃는 표정과 소리를 만들어내는 기관은 녹이 슬어 멈춰 버린 지 오래였던 터라, 경이롭다.


그녀는 근 1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고, 심할 때는 일주일 동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잘 오지 않고 자봤자 고작 2~3시간 정도라 했다. 그녀는 작년에 척추 4번과 5번 뼈 사이 디스크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음에도 그 아래 다른 뼈가 말썽을 부려 누워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그녀의 낯빛은 어두워져만 갔고 눈썹과 눈, 입꼬리, 어깨 모두 축 처져가기만 했다. 심지어 영혼까지 바닥으로 내려앉아 버렸다. 그녀는 자꾸 자책하는 생각만 든다고 했다. 방에서 이상한 것이 보인다더니 결국에는 그 이상한 것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단다.

"살고 싶지 않아. 죽고 싶어."

라는 말에 나는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엄마, 영화 볼래? TV로 무료 영화 볼 수 있어."

나는 병실 TV 리모컨을 들고 회색 표정의 그녀에게 물었다.

"틀어보던지."

드라마, 스릴러, 멜로, 코미디, 다큐멘터리 등의 카테고리 중 고심하다가 '코미디' 페이지에 들어가 영화를 골랐다. 엄정화 배우가 나온 두 편의 영화 '댄싱퀸'과 '미스 와이프'를 본 그녀가 간헐적으로 피식 웃었다. '끼익 끼이익' 소리가 나지만 그녀의 웃음 근육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오!' 난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잡생각이 안 나서 좋네. 보는 동안에는 이상한 생각이 안 들어."

퇴원을 하고 나서 집에서 멍하니 누워 있는 그녀에게 영화를 권했다. 재밌게 보았지만, 너무 금방 끝났다. 드라마를 찾았다.

'엄마는 줄거리가 간단하고 대놓고 웃기는 이야기를 좋아해!'

쿠팡 플레이로 2013년도에 방영된 '직장의 신'이라는 드라마를 틀었다. 채널 7번을 본방사수하며 엄마, 나, 동생이 함께 보며 웃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엄마의 웃음이 빵빵 터졌다. 순식간에 직장의 신을 다 뗀 엄마는 '낭랑 18세'가 보고 싶다고 했다. 역시 엄마는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봤던 건데도 재밌어?"

"응. 애써 집중하는 것도 있어. 나쁜 생각 하기 싫어서. 밝은 생각 하려고."

물리적 병이 다 나은 건 아니고,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많은 치유가 일어난 것이다. 수면의 양과 질도 훨씬 좋아졌다. 지금 엄마는 2006년~2007년도에 방영된 '거침없이 하이킥'을 가열차게 시청 중이다. 미니시리즈처럼 16부작이 아닌 167부작이다. (오예!) 직장의 신, 낭랑 18세, 거침없이 하이킥의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무뚝뚝한 딸 대신에 시공간을 초월한 큰 웃음을 안겨주시다니!


모두가 정규직을 소망하는 가운데 스스로 비정규직을 택한 자유로운 미스 김 이야기도, 낭랑 18세에 검사와 정략결혼한 말괄량이 정숙이 이야기도, 한의사 이순재 원장과 그의 처 나문희 여사 가족 중심으로 벌어지는 좌충우돌 이야기도 모두 만들어진 것이다. 심지어 10년도 더 넘었다. 가짜가 실제 삶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니,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이야기의 생명력과 영향력은 놀랍고 위대하구나! '깊은 우울'이라는 낭떠러지에 떨어져 버린 사람도 살려낼 정도이니 말이다. 잔혹한 학살자 샤리아르 왕에게 천일 동안 이야기를 들려주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셰헤라자드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야기', '스토리', '서사'가 이렇게 가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니 괜스레 뿌듯해진다. 이제 나도 이야기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3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고, 문예 창작과나 국문학과를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스토리텔러,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 내 꿈이다. 영상을 보고 꺄르르 웃는 엄마를 보며 더 이상 미루거나 핑계 대지 않기로 한 결심이 더욱 굳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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