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15.
옛날 선배 생각이 났다.
밤늦게까지 열심히 회의하고 나서는 담배 하나 피워 물며
"자 이제 됐어. 이렇게 결론을 내. 더 이상 없어. 내일 조연출은 스튜디오 의뢰하고..."
그런데 그 말을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수고하셨다고 인사하고 집에 들어가 쉬고 다음날 아침에 만나면 똑같은 멘트로 시작한다.
"아 내가 밤새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그러면 작가들과 조연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다시 회의를 시작한다. 또 하루 종일 열심히 회의하고 아이디어가 정리되면 예의 그 멘트가 또 나온다.
"자 이제 정말 끝이야. 이제 안 바꿔. 내일 이대로 스튜디오 잡고 스태프들 연락해! 정말 끝!"
역시 다음 날 아침에 만나면 인사가 똑같다.
"다들 와서 앉아봐. 내가 아무래도 찜찜해서 고민하느라 잠을 못 잤는데 말이야..."
프로그램 구성을 다듬는 과정은 길고 어렵다. 어제까지 단순했던 문제가 오늘 보면 아주 복잡해져 있고, 오늘 펑크 난 출연자 한 명 때문에 부분 구성을 들어내고, 옮기길 반복한다. 전에 있던 큰 회사에서 프로그램을 할 때는 힘줄 때와 뺄 때를 구분해 어떤 땐 미친 듯이 회의하면서 다듬고 때론 대충 편하게 구성해서 넘어갔는데, 거길 나와 내 프로그램을 하다 보면 하나하나 다소 지나치게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앞서 말한 선배만큼은 아니더라도 계속 원점으로 돌아가 이 방향이 맞는지, 내가 가진 카드들로 미션을 소화할 수 있을지 자문한다.
요즘 많이 보이는 친한 연예인들끼리 나와 떠들고 여행 가는 프로그램은 고민을 덜 할 텐데 (물론 그 나름 애로사항은 많지만...) 이번에 준비하는 프로그램처럼 미국 시장을 겨냥해 '포맷'으로 만들겠다며 달리다 보면 장치 하나하나, 룰 각각이 모두 고민거리다. 이들이 처음에 어떻게 만날 것인지, 미션을 하나씩 할지 그룹으로 할지, 미션을 피디가 읽어줄 건지 봉투에 담아서 뜯어볼 건지, 야외 1개에 스튜디오 4개로 할지 아님 다 스튜디오로 할지, 야외 미션을 하면 아침에 할지 오후 늦게 할지...
오늘은 캐스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구성 회의를 시작했다. 대략적인 틀이 잡혀있는 상태라 구획은 있지만 구체적인 벽돌 올리기가 필요한 시점이고 벽돌이 다 올라가면 페인트칠을 하고 가구를 맞춰야 한다.
전에 21세기위원회를 연출하던 시절, 난 '21세기위원회는 21세기위원회 다워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스튜디오에서 할 수 있는 각종 게임을 연구하고 웃음의 장치들을 넣고 정해진 예산 안에서 최선을 다해 무대를 고민했다. 그런데 같이 한 피디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 처음에는 나와 방향을 공유하더니 점점 다른 노선을 가기 시작하고 게임보다는 '공익성을 강조한 야외 구성물'을 하나씩 넣더니 몇 달 후에는 격주로 "올 스튜디오 vs. 올 야외 구성" 구도로 굳어 버렸다. 그걸 정리해야 할 부장도 경쟁을 부추기는 차원에서 방치하고 매주 서로 완전히 다른 컬러의 프로그램이 하나의 이름으로 방송이 되었으니...
힘들게 꾸려가다가 강펀치를 때린 건 시청자위원으로 온 어느 교수였다. 평소 같으면 절대 TV를 안 볼 양반이 모니터를 하느라 프로그램을 보았단다. 그러면서 아주 상냥하면서도 거만하게 멘트를 던졌다.
"아주 공익적이고 좋은 프로입니다. 그런데 격주로 너무 차이가 나요. 한 주는 너무 좋은 데 그다음 주에는 그저 낄낄거리고 지들끼리 게임이나 하더라고요. 그런 수준 낮은 프로그램은 왜 만드는 거죠?"
20분 정도 시청자 위원으로부터 지독한 고문을 당하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장이 한마디 하라 길래 할 말 없다고 받았다. 이후에 부장과 치열하게 말싸움하며 사사건건 대들다가 1년 반 정도 버라이어티 연출에서 멀어진 게 아마 그때쯤부터였던 것 같다. 이후부터 기존 컬러에 맞게 흐름에 맞춰 '~답게' 구성하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 어차피 조직의 배려나 이해는 없다. 버라이어티를 하든 음악프로그램을 하든 무조건 임팩트를 주려했고 프로그램을 하나 하더라도 '이게 내 커리어에서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올인했다. "시스템을 너무 업그레이드해 버리면 뒤에 하는 사람들이 받아서 하기 어렵잖아"
누가 이런 말을 하면 웃으며 경멸했다.
얼마 전 나와 편집하던 친구가 프로그램 구성이랑 편집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묻길래 '소설'이나 '웹툰'을 많이 읽으라 했다. 다양한 재료들을 모두 다른 호흡으로 엮어가는 능력을 키우는 데는 이야기가 최고일 듯하다. 그리고, 잘 버티고 견뎌야 한다고 했다. 구성보다 연예인과 친한 게 먼저라고도 했다. 좋은 스태프를 만나는 운도 중요하다고도 얘기했다.
오늘까지 작가들과 회의한 프로그램 구조를 내일도 계속 리셋하며 최적의 구성을 찾아낼 단계다. 서둘지 말고 하나씩 시뮬레이션하며 최선의 답을 찾는 것이 길이다. 한 달 좀 모자라지만, 아직 적지 않은 시간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