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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노 Apr 04. 2022

와이프와 프라이팬



 와이프는 또 설거지통에 기름 묻은 프라이팬을 그대로 넣어 두었다. 담겨 있던 그릇들 모두 기름 범벅이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부분에서 화를 내야 할까. 기름을 닦아내지 않은 기본 상식에 대해서? 아니면 이것에 대해 수차례 얘기했던 내 말을 무시한 것에 대해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기름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래, 자기도 치우려고 했던 거겠지'하며 마음을 비워 버린다.


 화를 내는 것은 지친다. 이미,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모든 진이 빠져버린다. 화를 내려면 그 이유부터 그 이유가 나에게 어떤 상처를 입히고 감정을 망치게 되었는지 설명해야 한다. 설명이란 단어에서 벌써 말문이 턱 막힌다. 그럴 바엔 구태여 화를 내고 싶지 않다. 화를 내는 것에 뒤따르는 일련의 행동들을 소화해내야 한다면, 차라리 마음을 비워버리는 게 낫다.  화를 내기 위해 그것을 굳이 복기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내 감정을 설명해야 한다니, 쓸데없는 에너지 소비다.

 


그 때문인지 와이프는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라던가, ' '이리 와서 얘기 좀 해'라는 말을 하지만, 그쯤 되면 이미 내 머릿속은 하얀 백지장이 되어 있기에, 어떤 이야기도 할 수가 없다. 그저 빨리 이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와이프는 이런 나를 보고, 자기가 화를 더 내다가 다시 한참을 침묵하고선 이내 밖으로 나가버린다. 

 그러나 너무 안타깝고, 정말 애석하게도(그러니까 나도 그러고 싶지 않지만) 나는 홀로 남은 빈 집에서 드디어 위안을 얻는다.



저건 정리를 좀 해줬으면 좋겠어, 와이프는 거실 한 벽에 쌓아 둔 내 책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누운 채로 읽던 책을 내려놓고 그녀를 따라 거실 벽에 쌓인 책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다 읽은 책이니 처분하겠다는 내 말에, 그냥 한편에 쌓아두자고 했던 것은 와이프였다. 나는 그날의 우리 대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저 알았어, 하고 대답했다. 와이프는 내가 대답을 한 후에도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계속해서 책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책이었다면, 아마도 따가운 눈초리에 굴러서라도 나갔을 법한 눈치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책을 챙기기 시작했다. 



 마음에 안 들면, 안 들게 되면, 치우면 그만인 일이다. 그것뿐이다. 언제 어디서부터 그것이 거슬렸는지 따위는 필요치 않다. 처음에는 괜찮았을지라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게 되면, 정리하면 끝인 일이다. 물어볼 필요도 대답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사라질 것들에 대해서라면.



 나는 아쉬움이 남는 책 몇 권을 빼놓지도 않고 그대로 노끈으로 묶어 쓰레기장에 버렸다. 

어쩌면 나는 많이 지쳤을는지 모른다. 들여다보고, 또 드러내 보이는 일에.

설거지를 마쳤으나, 고무장갑엔 여전히 기름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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