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수 없는 이카로스들을 위하여
탐욕은 언제나 악이었을까
탐욕은 흔히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 동굴을 벗어나고, 농사를 짓고,
문명을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 역시 ‘더 갖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문제는 욕망이 아니라,
욕망이 통제력을 잃는 순간이다.
이 글은 고대 신화에서 시작해
예술 속 탐욕의 얼굴을 거쳐
오늘날 보이스피싱이라는 형태로 되살아난
인간 탐욕의 연대기를 따라간다.
“탐욕은 소유가 아니라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인류 최초의 탐욕은 금도, 권력도, 생존도 아니었다.
그것은 ‘알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선악과는
배고픔을 해결하는 열매가 아니었고
부를 약속하는 보물도 아니었다.
그 열매가 유혹이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려
신과 같이 될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더 많이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손을 뻗었다.
이 지점에서 탐욕은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자기 한계를 넘고 싶어 하는 충동으로 정의된다.
선악과 사건의 핵심은
‘금지된 것을 어겼다’가 아니다.
인간이 처음으로 이렇게 말한 순간이다.
나는 주어진 존재로 만족하지 않겠다.
그 대가로 인간은 에덴을 잃었고, 노동을 얻었으며, 죽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추방은 형벌이자 동시에 출발이었다.
인간은 더 이상 보호받는 피조물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유가 존재를 압도할 때”
미다스 왕의 비극은 그가 부자가 되고 싶어 해서가 아니다. 그가 ‘생명’보다 ‘물질’을 우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이 닿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했을 때 그는 기쁨에 찼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황금으로 변한 빵은 먹을 수 없었고 황금으로 변한 물은 마실 수 없으며, 황금으로 변한 사랑하는 딸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버린 것이다.
니콜라 푸생의 그림 <미다스와 바쿠스> 속에서 왕은 절규한다. 탐욕의 끝은 ‘더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누릴 수 없게 되는 고립’이다. 탐욕은 결국 생명을 차가운 금속으로 바꿔버리는 저주였다.
“태양을 향한 질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이카로스의 날개는 밀랍으로 붙인 가짜 날개였다. 하지만 하늘을 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경고인 “너무 높게도, 너무 낮게도 날지 말라”는 중용의 목소리는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브뤼헐의 명화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을 보면, 이카로스는 화면 구석에 아주 작게 처박혀 있다. 농부는 밭을 갈고, 배는 유유히 지나간다. 세상은 그의 추락에 관심이 없다. 이 그림은 잔인한 진실을 말해준다.
분수를 넘은 탐욕의 끝은 비장한 비극이 아니라 그저 초라한 소멸일 뿐이란 걸 말이다.
기독교에서 탐욕은
교만 다음으로 위험한 죄로 분류된다.
왜일까?
탐욕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괜찮아”
“이번만 성공하면 돼”
“남들도 다 하잖아”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 <7대 죄악> 속 탐욕은 흉측한 괴물이 아니다. 오히려 근면하고 성실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얼굴은 탐욕의 찌든 영혼들을 위로한다.
피터 브뤼헐의 판화 <탐욕>에서도 사람들은 돈을 세느라 바쁘다. 그들에게 그것은 악이 아니라 ‘계획’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욕은 무섭다. 그것은 악처럼 보이지 않고 희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탐욕은 더 이상 개인의 도덕 문제만이 아니다.
금융, 투기, 식민지, 전쟁까지 탐욕은 시스템화되었다.
금광개발부터 시작해 주식 버블, 식민지 수탈, 전쟁 무기 산업까지 수많은 도덕적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는 사회문제들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인간의 탐욕은 영특하고 섬뜩하게 날로 발전하고 있었다.
개인이 빵 하나를 훔치면 범죄자가 되지만, 집단이 다른 나라의 자원을 수탈하면 ‘경제 발전’이 된다. 탐욕은 이제 죄책감 없는 (자본을 위한) 거대한 기계가 되어버렸다.
현대에 와서는 신종 사기들이 판을 친다.
그중 가장 조직화되어 있는 보이스피싱이라는 사기는 막을 방법이 없다.
이는 남의 돈을 탐하는 단순한 사기가 아니다.
사기를 당하는 자의 탐욕의 심리를 정교하게 설계한 구조물이다.
“이번 기회만 잡으면”
“손해를 만회할 수 있다”
“지금 포기하면 모든 게 끝난다”
이때 작동하는 감정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잃기 싫은 마음’과 ‘되찾고 싶은 욕망’이다.
탐욕은 언제나
‘더 얻고 싶다’가 아니라
‘지금까지 잃은 걸 무효로 만들고 싶다’는 얼굴로 나타난다.
그래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이건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문제다.
탐욕을 제거할 수는 없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탐욕을 숨길 것인가
탐욕을 바라볼 것인가
고대 신화가 경고한 것도
예술이 반복해서 그린 것도
현대 사기가 노리는 것도
모두 같은 질문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탐욕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처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