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첫여름>을 보고 (허가영 감독 / 2025년 8월)
‘처음’이라는 감정은 언제라도 찾아온다. 인생의 황혼기라고 해서 모든 일들이 저물어만 갈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첫’ 여름의 설렘과 황홀과 뜨거움은 젊은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과장도 억지도 없이, 한 노년 여성의 달뜬 표정과 몸짓을 통해서.
평생을 아내와 엄마로만 살아왔던 영순은 학수를 만난 후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생각하게 되고, 가부장적 가족제도 속에서 억압되어 있던 내면의 감정들을 꺼내보게 된다. 그녀가 느끼는 설렘은 학수라는 한 남자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이불을 덮고 함께 누운 채로, 이불 밖으로 나온 발을 서로 살짝살짝 건드리며 장난치는 모습을 담아낸 장면은 어찌나 간질거리고 예쁘던지. 그 순간엔 그들이 그저 첫사랑에 빠진 소년과 소녀 같았고, 할머니의 발이 아니라 정말 소녀의 발처럼 수줍어 보였다. 나이가 얼마나 들었든 누구의 마음에나 남아 있는 소년과 소녀의 풋풋함. 세월과 삶의 무게에 묻혀 있던 그 마음을 되찾는 시간.
그러나 영순에게 ‘처음’을 느끼게 해 주었던 그 사랑은 갑작스러운 상실감도 함께 안겨준다. 한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던 학수의 부고를 뒤늦게 듣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의 49재와 손녀딸의 결혼식이 겹친 상황에서 영순은 학수의 49재에 가기로 결심한다. 가족들 모두가 서운해하고 영순을 비난해도 그녀는 미안해하지 않고 당당하고 결연하게 그곳으로 간다. 그리고 49재가 끝난 후 아무도 없는 절의 공터에서 느릿느릿 춤을 춘다.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떠나보낸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듯이.
감정의 과잉이 없으면서도 솔직하게 표현된 노년 여성의 설렘과 사랑. 그리고 삶에서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상실마저도 담담하게 수용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며, 인생의 어느 시기에라도 찾아올 수 있는 ‘첫’마음, ‘첫’경험, ‘첫’계절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다가왔던,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처음’의 시간들을 잘 느끼고 잘 기억하고 잘 보내주고 싶다는 마음.
p.s. 올해 칸 영화제 라 시네프(La Cinef) 부문에서 1등상을 수상한 단편 영화로, 러닝 타임은 30분 남짓인데, 좋은 영화를 볼 때는 러닝 타임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좋은 소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진 출처 : Da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