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송이와 눈덩이

서정아 짧은소설

by 서정아


고향집에서는 언제나 멀리 설산이 보였지만 비벡은 한 번도 눈을 만져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 와서야 그는 비로소 솜 같은 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자신의 피부에 닿는 장면을, 그 눈이 물방울이 되어 자신의 몸에서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건 무척 신비롭고 독특하며 놀랍고도 슬픈 경험이었다. 눈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과는 상관없이, 비벡의 기억 속에 눈은 언제나 녹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가까이서 마주한 눈은 생각보다 빠르게 녹아버렸다. 그렇게 사라져버리다니. 영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오래 마주하고 싶은 존재들이 그렇게 한 순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울고 싶어졌다. 몸이 반쯤 작아진 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하다가 끝내 숨결마저 멈추었던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가족들은 할머니가 조상신이 되어 여전히 집에 머물고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비벡은 그 말에서 위안을 받지 못했다. 그는 할머니의 영혼이 아니라 실체와 더 함께 하고 싶었다. 할머니의 눈빛, 손길, 목소리, 냄새… 그런 것들과.

숙소에서 함께 지내는 동료들은 비벡에게 말했다. “비벡, 매일 그렇게 일찍 나갈 필요 없어. 네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사장님에게는 돼지보다 못한 존재일 뿐이야. 우리는 사장님에게 우리의 권리를 요구할 거야. 죽지 않고 살아서 끝까지 할 거야.” 3년 전 돼지 축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동향 사람의 이야기를 비벡도 들었다. 그러니까 ‘죽지 않고 살아서’라는 말은 단순한 강조법이 아니라 절실함이었다. 비벡은 동료들이 사장님 앞에 서서 노동 시간을 지켜줄 것에 대한 요구를 할 때 멀리서 사진을 찍었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글로 써서, 한국의 인권단체와 진보 언론에 보내기로 했다. 휴대폰으로 찍은 그 사진을 나중에 살펴보면서 비벡은 마음이 좀 아팠다. 사진을 찍을 때는 그들의 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일렬로 선 채 사장님에게 요구사항을 전하는 동료들은 모두 두 손을 배 앞에 공손히 모으고 있었다. 그건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사장님이 지시했던 태도였다. 사장님 앞에 서 있을 때는 항상 두 손을 모을 것. 부당함에 저항할 때조차 동료들은 그 손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는 주눅 들지 않았다. 사장이 욕을 하고 협박을 하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한 친구의 머리를 때렸지만, 그들은 준비했던 말을 끝까지 했다. 말이 서툴다고 해서 마음까지 서툰 것은 아니었다.

비벡이 일찍 축사로 나가 일을 더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료들의 오해가 있었다. 비벡은 축사로 가는 길에 늘 마야 할머니 집에 들러 시간을 보냈다. 동백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집에 혼자 살고 있는 할머니. 그녀는 비벡이 집 앞을 지나가는 시간에 맞춰 고구마나 달걀 같은 것을 삶아두었다. “비배야, 고구마 먹고 가라.”하면서 쪼글쪼글한 입으로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 돌아가신 할머니가 이곳에 환생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이름마저도 같았다. 마야. 비벡이 그녀의 발음을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뒤로 “마야 할머니.”하고 부르면 그녀는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비벡을 보았다. 고향에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고된 노동을 하고 때로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면서, 어떤 순간에는 한국이 싫어졌고 설산이 보이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질 때가 있었지만, 마야 할머니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면 다른 건 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잃었던 할머니의 실체를 여기서 되찾았으니까.

밤부터 쌓인 눈은 제법 두터운 융단이 되었다. 숙소 앞에 쪼그려 앉아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던 비벡은 두 손으로 바닥의 눈을 쓸어 모아 뭉치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누르고 눌러 하얀 돌처럼 만든 다음 눈밭에 굴려 몸집을 키웠다. 그리고 다시 꾹꾹 누르고 굴리기를 반복했다. 눈덩이는 점점 커다래지고 단단해졌다. 고향집에서 보이던 설산만큼 커지지는 못할지라도, 자신의 피부에 와 닿는 순간 녹아 사라지던 눈송이 하나의 외로움은 넘어설 수 있을 만큼의 단단함이었다.



* 2025 요산문학축전 자료집에 수록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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