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기록(4)

- 제대로 쓰지 못한, 그러나 기억하고 싶은 영화들.

by 서정아

1.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 보리스 로즈킨 감독


파리에서 자전거로 음식 배달 일을 하며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 애쓰는 기니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 ‘술레이만’의 이야기로, 2024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이다.

주인공은 매일 시간과 돈에 쫒기며 배달 플랫폼의 고객만족도 평가에 시달리는 처지이지만, 곧 합법적인 거주권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시간을 쪼개 난민 심사 면접 준비를 한다. 그러던 중 고국에 있던 여자친구로부터 이별통보를 받게 되고, 불법으로 대여했던 배달앱 계정마저 정지를 당하게 된다.

미등록 이주민의 소외된 삶과 노동, 사회적 약자로서 체감할 수밖에 없는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들... 이런 세계 안에서 우리는 타인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있는지, 타인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는 영화.

(주연 배우 ‘상가레’는 이 영화로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고도 프랑스에서 합법적 체류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2.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짐 자무쉬 감독


미국, 아일랜드, 프랑스, 세 나라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인물들이 등장해 가족 관계 속의 미세한 균열을 보여주는 옴니버스 영화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다. 가족 간의 균열, 소통 불능, 피상적인 대화와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 상실감 등을 짐 자무쉬의 세련된 감각과 블랙 유머를 통해 그려냈다.

<파더> : 두 남매는 오랫동안 소원했던 아버지의 집을 방문하는데, 세 사람은 혈연으로 묶인 가족의 의무를 최소한으로나마 지키려 하지만 대화는 피상적으로 겉돌기만 하고, 자녀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해왔던 아버지는 의뭉스러운 비밀을 감추고 있다.

<마더> : 완전히 다른 성향으로 자라난 두 자매는 동시에 어머니의 집을 방문한다. 개성이 너무나도 뚜렷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미묘한 경쟁심과 거리감을 느끼며 어색한 시간을 보낸다.

<시스터 브라더> : 부모의 죽음 이후 쌍둥이 남매가 각자의 상실감을 견뎌내고 서로에게 위무 받으며 유품을 정리하는 이야기.

세 에피소드 중에 <파더>가 제일 웃겼다. 자녀들 앞에서 궁핍을 연기하다가 자녀들이 떠나자 롤렉스를 차고 고급 세단을 타고 데이트 하러 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이라니!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류의 희생과 감동보다 이런 ‘파더’의 뻔뻔함이 가족 서사에서 훨씬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우리의 최선> 알레한드로 페르난데스 감독


‘파이드라’라는 고전 비극 작품 상연을 중심으로 젊은 연극 연출가의 예술적 신념과 현실적 갈등을 보여주는 영화. 2018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이다.

경제적인 문제, 육아 문제 등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고전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애쓰던 체코의 연극 연출가가 주인공인데, 그는 초연을 6주 앞두고 두 주연 배우의 스캔들로 배우 공백의 위기를 겪는다. 공연 예산과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아내와의 갈등도 깊어지던 가운데, 그는 새로 뽑은 여배우와 감정적으로 교감하며 깊은 관계를 맺게 되지만 그 관계 또한 파국으로 치달으며 연극 상연에 또 다시 곤란을 겪게 된다.

영화 속에서 연출가와 아내와 여배우는 단순히 불륜의 삼각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아내로 상징되는 현실 세계, 그리고 여배우로 상징되는 예술 세계 사이에서의 내적 갈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였다. 예술과 현실의 간극은 그처럼 좁혀지지 않고, 예술가의 열정과 자율적 의지만으로 자신의 꿈을 이뤄내기란 요원하다.

여배우와의 관계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결국 연극 상연은 그가 의도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체념과 현실적 수긍을 하게 된 듯한 그의 얼굴. 주인공이 아내와 침대에 마주 누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조금 서글프다. 예술적 욕망과 순수한 열정 같은 것들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육아’로 비유되는 현실의 갈등과 문제 상황들을 끌어안기로 결심한 자의 쓸쓸한 평화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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