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조각들이 당신의 기억으로 흐르도록
기억을 머금은 풍경의 조각들 사이를 유영하는 것처럼
2022
2022년이 모두 지나갔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올해를 정리하고 있지만 그러기에는 매우 혼란스러운 한 해였다 올해의 감상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다뤄보도록 하고 우선은 메모리아가 연말과 함께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야기하려 한다. 메모리아는 흩어져 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정확히는 풍경으로 담긴 기억을 이어 나가 한 편의 영화로 탄생했다. 각각의 풍경은 담고 있는 시간, 온도, 습기, 무엇보다 들려오는 소리가 다르다. 그러나 아피찻퐁 감독은 ‘메모리아’라는 한 편의 영화를 통해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사이로 흐르는 기억으로 재조합했다. 절망적이고 행복하고 평화롭거나 혼란스러웠던 2022년의 기억을 관객으로 하여금 하나의 풍경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영화였다.
기억을 담아내는 영화라는 매체의 역할
영화의 이름인 Memoria는 라틴어로 기억을 뜻한다. 이에 따라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 ‘메모리아’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기억이 어떻게 흘러갈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영화는 카메라, 음향(마이크 등) 등을 통해서 특정한 순간을 담아 표현해 왔다. 단순히 해당 시간대를 온전히 담는 것을 넘어 시간의 끈을 늘리거나 줄이며 재단해 왔다. 아피찻퐁 감독은 순간의 기억을 영화가 그래왔던 것처럼 가만히 응시하거나 다른 순간들과 결합하여 이야기로 연결했다. 이 때문에 ‘메모리아’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아닌 미장센에 담기는 것들 자체가 내러티브가 된다. 체험의 색깔을 짙게 띠는 영화는 관객들이 천천히 과거로부터 흐르는 기억을 따라 주인공이 겪게 되는 일들을 다양한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게 한다. ‘메모리아’의 내러티브 안에서 기억은 단순히 한 명의 머릿속에서 순간으로 남지 않는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우리가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가 표현된 감각적 경험을 나누기 때문에 ‘메모리아’에서 주인공이 겪는 기억들은 시간과 공간적 한계를 초월하여 모두에게 흐른다. 매체의 역할을 정확히 포착하여 초월적인 감각의 내러티브를 형성했다.
아피찻퐁의 카메라
아피찻퐁 감독의 정적인 스타일은 ‘메모리아’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주인공의 순간으로 나눠진 기억의 소리를 따라가야 하는 이야기에서 영화가 선사하는 감각적인 풍경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카메라는 앞서 나가지 않고 정적인 리듬을 유지한다. 카메라 워킹은 철저히 제한되어 있고 ‘메모리아’의 정적으로 풍경만을 담아내기 위한 영화적 윤리 아래, 인물만을 담아내기 위한 클로즈업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단 몇 순간만이 인물을 정면으로 응시하는데 첫 번째 순간은 ‘에르난’이 잠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에르난’이 죽음으로써 그는 더 이상 카메라 앞에서 행동하는 인간이 아닌, 죽음을 맞이한 하나의 요소로 기억에 남게 된다. 이후 다시 깨어났을 때 그가 말하는 죽음은 잠시 멈춰 있는 것뿐이라는 말은 자신이 남은 기억의 순간성을 상징한다. 남은 클로즈업의 순간은 주인공 제시카가 영화의 결말 부에서 에르난과 기억을 흐르게 하고 만물의 기억을 읽어내면서부터 나타난다. 이를 기점으로 제시카는 끝내 폭발음으로 표현되는 기억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닌 자신 또한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흐르는 기억의 일부가 된다. ‘메모리아’에서 기억들은 이어지기 때문에 제시카 또한 자신이 자리한 기억이 맞이할 미래의 모습까지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스타일을 고수하여 풍경과 기억만을 포착해낸 카메라가 이뤄낸 성취라고 볼 수 있다.
풍경과 소리
상술했듯이 ‘메모리아’의 카메라는 인물을 포착하기 위해 기동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기억 속에 하나의 조각으로 남을 풍경만을 포착한다. 이것이 ‘메모리아’가 체험 영화로 여겨지는 이유인데, 극단적으로 제한된 카메라 워킹과 정적인 스타일 아래에서 우리는 풍경으로 묘사되는 기억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시각적인 묘사를 넘어 ‘메모리아’의 정적인 풍경을 더욱 다채롭게 채우는 요소는 ‘소리’이다. 각 공간이 지니는 특이성, 규모를 명확하게 전달하며 날씨와 자연환경이 지닌 고유의 소리를 전달해내는 실력은 생동감이 느껴질 정도로 탁월하다. 타 영화들의 화법과는 달리 각 순간의 소리가 관객들의 인상 속에서 일렁이게 하는 황홀한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메모리아’라는 영화는 극장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영화가 우리에게 전한 흐르는 기억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화법을 통해서 관객은 자신의 인생을 영화적 순간으로 포착하고 기억하여 누군가에게 온전히 나눌 수 있다. 매체를 사랑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극단적으로 고수한 거장이 해낸 올해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