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에서 절대다수, 수천만 명 한국인 중 한 명이었다. 한국에서 자라면서는 다수, 소수그룹을 나눠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부분이다.
이 나라에서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 한국인은 이 나라에서는 '다른 여권, ' '다른 국적'이다.
그리고 극소수다.
각종 정부의 통계나 언론 보도에서 나의 정체성은 아시아인(the Asian)이나 소수 인종(the minorities)이라는 그 기준 모를 광범위한 단어 속에 포함되어 버린다.
다수와 소수가 나뉘는 경계는 사실 굉장히 모호해 보이면서도 단순하다. 그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느냐가 기준이 된다.
이 나라에서 소수 인종을 제도적으로 차별하거나 구분 짓는 정책이나 법은 없다. 따라서 살면서 제도적으로 겪는 억울함은 없다.
하지만 소수의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이 나라 다수 그룹의 생각, 문화적 태도, 삶의 방식에 내면화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생활이 익숙해진 것과는 분명 별개의 영역이다.
한국에서는 당연하게 적절하다고, 혹은 응당 그래야 한다고 배워서 했던 행동이
이 나라에서는 낯선 사고방식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소수 집단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건 마음 하나, 행동 하나를 조심스럽게 만든다.
나의 행동이 한눈에 띄는 내 인종적 특성으로 인해 더욱이 튀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에 말이다.
한 번은 마트에서 장 보던 중, 실수로 한 유리용기에 담긴 제품을 건드려 깨뜨린 적이 있다.
와장창 하면서 바닥에 그 유리병이 떨어지던 찰나,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산산조각 난 유리가 튀어 다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저 아시안 사람이 사고 쳤네'라고 생각하며 바라볼 그 시선이 두려웠다.
한국이었다면 나의 사고 회로가 과연 이런 식으로 흘렀을까?
어느 하루, 출근 시간대라 좌석, 복도 사람들로 꽉 들어찬 버스를 탄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만원 버스에 나만 다수가 아닌 소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좁은 공간에 밀도 있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 나는 눈에 띄게 '다른' 사람이었다.
다들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 모른다. 이건 나의 지극히도 과한 느낌이었을까, 사실이었을까.
이런 작은 하루의 조각들이 쌓여가면서 나의 생각, 행동은 달라져 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휴양지가 다른 특별한 섬도, 나라도 아니다. 우리는 휴가를 한국으로 떠난다.
공항에 내려서 부터 느낄 수 있는 동질감.
각자의 개성과 생각은 물론 제각각 이겠지만, 대체로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사회적 관습을 익히고 배우고 경험하면서 살아온 사람들 속에서 자유를 얻는 기분이다.
다수와 소수, 어느 한쪽을 가해자와 피해자, 선과 악으로 구분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양쪽 상반된 범주에 둘 다 몸담고 살아 보니 소수집단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나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는 이 나라에서, 소수 인종으로서 언제쯤,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어디에서 살고 있든, 소수 인종으로 분류되어 살아가고 있을 다른 누군가도, 나도,
좀더 편안해졌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