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 길스토리 존재를 알게 되고 나서.
6년이 다 되어가는 기나긴 박사 연구,
그리고 출판사 원서 번역과 매달 마감 일정이 있는 해외 통신원 원고.
하는 일이 이렇다 보니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좋았다.
그 중 한 가지 소확행은 남편과 밥 먹으면서 함께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일이었다. 남편은 나보다 한국 드라마, 영화를 훨씬 더 많이 보고 잘 알다 보니, 주로 남편의 안목과 추천을 따르는 편이다.
올해 들어 남편이 여러 번이나 재밌다고 강력하게 어필했는데 나는 미지근하게 반응했던 드라마를 미루다가 결국 봤다. 2019년 방영된 '열혈사제'였다.
이미 한국에서는 인기 태풍이 한번 몰아치고도 2년이나 지나 뒤늦은 시점이지만, 멀리 떨어져 지내는 우리에겐 막 방영한 작품을 다 본 것처럼 들뜨는 일이었고 이 시국에 시청한 게 신의 한 수였다.
1년이 다 돼가는 강도 높은 락다운에 이것저것 못하고 창살 없는 감옥 같은 이 곳의 생활,
터널 끝 빛이 보일 듯 말듯한데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박사 학위 그 종이 한 장,
몇 년간의 해외살이에 한국이 그리워지는 향수.
이 모든 게 겹쳐 정신적으로 지쳐있었던 중, 기분 좋게 한국 감수성이 번뜩 깨어난 느낌이었다. 드라마 속에 나오는 풍경을 보며 서울 거리를 걷고, 소주도 마시고, 왕만두가 먹고 싶었다.
사실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위로가 됐다거나 큰 힘을 얻었다는 말들을 들을 때면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화면 속이 아니라 당장 내 옆에 앉아있는 소중한 가족, 친구, 맛난 음식, 취미 등 미소를 찾을 곳이 너무나도 많은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스쳐 지나가듯 봤던 드라마 한 편은 내 생각이 옳지 않았다고 말해줬다.
하지만 내가 이 나라에서, 김남길 배우분을 응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이 열혈사제라는 작품 때문만이 아니다. 드라마가 재밌었다면 그것만 보고 쉬이 잊었을 지도 모른다.
프로필을 검색하다 보니 서울시 문화예술 NGO '길스토리'를 설립해서 몇 년째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건 정말 오랜 기간, '한국에서도 연예인 누군가 단체를 세워서 본인의 이름을 체계적으로, 선한 목적으로 활용한다면 정말 좋을텐데' 하고 바라던 모습이었다.
해외에서는 유명인사가 비영리/비정부 민간단체를 세워서 기후변화, 예술, 보건 분야 등 특정 이슈에 대해 적극적인 옹호 활동을 펼치기도 하고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사례가 꽤 많은 편이다. 물론 기부도, NGO 운영과 프로보노 참여는 그 어느 나라에서든지 배달음식 주문하듯 즉흥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심이란 마음이 필요한 일이다.
한국에서는 어떤 재난이 발생했을 때 팬클럽이나 연예인이 많이 기부하기도 하고, 연예인이 기존 유명 NGO의 홍보대사 활동을 하거나, 자선 바자회 참여하는 등 비정기적 행사 성격이 주를 이루는 것 같아 보였다.
어마어마한 금액을 기부해서 사랑의 열매 사회복지 공동모금회 고액기부자 클럽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명단에 이름을 올린 연예인 분들도 많은 걸로 알고 있다.
반드시 어떤 단체를 세우는 게 더 좋다는 비교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에서도, 일반인보다는 조금 더 큰 파급력을 가진 연예인들이 본인의 뜻을 반영한 NGO를 세워서 사회에 의미 있는 활동을 꾸준히 하는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연예인 분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발견한 연예인으로는 김남길 배우분이 처음이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가 문화예술 쪽은 아니지만 NGO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보니, 그동안 국내외 NGO 관계자 분들을 많이 만나고 같이 일해왔다. 그래서 그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내면을 보고 느낀 바가 많았다. NGO를 설립하는 게 행정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일단 설립하고 꾸준하게 운영해 나간다는 건 더더욱 대단한 일이다.
기부, 비영리 활동, 사회공헌 등이란 개념들이 자칫 추상적이고 마음씨 좋고 착한 사람들만 할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이 마음의 장벽을 낮추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깝게 다가가는데 있어 연예인의 인지도와 영향력은 너무나도 가치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내가 이 배우분이 운영하는 단체에 재능 기부해서 기여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보기로 했다.
K-pop, K-drama 현상 같은 주제로는 영문 또는 국문 논문이 정말 많지만,
한국의 연예인이 단체를 세워서 여러 활동을 통해 기부금을 모으고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알리는 사례를 다룬 논문은 없는 것 같으니 말이다.
홈페이지 상으로는 사실 기부금으로 어떤 활동을 하는지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할 순 없었지만, 큰 틀에서 봤을 때는 좋은 사례연구(case study)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지면 언론 기사도, 영상 인터뷰도 의미 있지만 학술적인 기록을 남기는 것도 분명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어떤 연예인을 안다는건 너무나도 일방통행인 인연이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 사이도 아니고, 서로 살아가는 환경도 다르며, 미디어 밖에서는 어떤 성격인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서, 한 연예인이 앞으로 더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
나는 이 나라에서 예기치 않게 우리에게 기분 좋은 시간을 선사해 준 작품을 이끌었던 김남길 배우분을 응원하게 되었고,
그 배우가 이끌고 있는 NGO 길스토리를 응원하게 되었다.
부디 배우분이나 단체가 큰 부침을 겪지 않고, 오랫동안 발자국을 남겨가면서, 10년, 20년 역사를 쌓아갈 수 있길 바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