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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f Bong May 17. 2024

결기주간

여보 고마워!

매년 결혼기념일이 오면 그 핑계로 우리 부부는 일주일 정도의 결기주간을 가진다. 맛있는 것도 해 먹고 시내를 걸으며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특히, 기념일 당일은 낮술을 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해서 그곳부터 걷기 시작해서 대략 2만보를 걷는다. 낮술과 걷기의 조합은 아내의 아이디어로 건강을 위해서란다. 


한동안은 남영동과 용산에 맛집들이 생기면서 자주 방문하게 되었는데 특히,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영업하는 베트남 스타일의 쌀국숫집은 우리의 기념일을 즐기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처음엔 쌀국수가 맛있어서 가다가 나중엔 잔술로 파는 베트남 소주 넴머가(누룽지사탕 맛이 난다) 마시는 재미로 다니게 되었다. 한두 잔 마시다 보면 얼큰해지는데 이때부터는 아무리 걸어도 피곤하지 않다. 아내의 말이 맞는가 보다. 


몇 해 쌀국숫집을 잘 다녔는데 올해는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다가 아내의 제안으로 신설동 어머니 OO집을 시작으로 동묘, 광희문, 을지로, 용산을 걷는 것으로 정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전철을 타고 우리의 시작점인 어머니 OOO집에서 뜨뜻한 선지해장국을 시켜 평소에 잘 마시지 않는 소주도 곁들이며 출발의 신호탄을 올렸다. 

선지해장국

내가 알고 있던 선지해장국과는 그 모양새와 맛이 달랐다.  신선하고 탱탱한 선지 그리고 으깨 질정도로 푹 삶아 나온 돼지고기 마치 목살을 브레이징(braising)해서 만드는  풀드포크(pulled pork)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거기에 부드럽게 익혀진 우거지, 적절한 간과 매운맛을 주는 다진 양념까지. 진한 국물은 아니지만 심심하면서 깔끔한 맛이었다. 아침에 마시는 소주가 취기를 만드니 시작으론 완벽했던 것 같다. 자 출발!


그다음으로 우리는 방향을 동묘 풍물시장으로 잡고 맛집이 있으면 들어가서 먹는 것으로 하고 걷기 시작했다. 풍물시장에 도착해서 동묘에도 들어가 보고 삼국지에 나오는 대표적인 인물인 관우에 대해 얘기도 하고 옛날에도 관우는 꽤 인기가 있었구나, 삼국지는 최소 3번 이상은 읽어야 읽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는 둥 하면서 골동품 구경도 하고 빈티지 제품도 살펴봤다.  


그런데, 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아니 이게 여기서 왜 나와? 

그것은 바로 내가 너무 사고 싶었던 빨간색 스타우브(Staub) 그릴팬이었다. 상태도 양호하고 이게 진짜가 맞는지 여러 번 살피고 확인한 후 현금 4만에 구입. 이 팬은 현시세로 17만 원 정도 한다. 

스타우브 그릴팬 

 우리 부부는 담부터는 이 코스로 자주 와서 중고 주방용품을 살펴보자며 스타우브 그릴팬이 담긴 검정비닐봉지를 흔들며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을지로 가맥 OO식품으로 향했다. 이곳은 을지로 인쇄골목에 있는 식당으로 가까운 곳에 와인샾이 있어 괜찮은 와인을 구입해 가면 병당 만원의 코키지차지만 내는 고깃집이다. 아직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피크 때가 아니면 기다리지 않고 들어갈 수 있다. 가격대비 음식이 꽤 잘 나오고 단체인 경우 예약도 가능하다. 분위기는 마치 옛날 인쇄소와 슈퍼 안에 고깃집을 넣은 것 같은 분위기다. 찾아오는 사람들도 연령대가 다양하다. 젊은 사람들한테는 오래된 인쇄골목에서 느끼는 레트로 느낌이 신기한 듯하다. 나는 이 지역 출신이라 너무 익숙한 분위기고 어렸을 때 추억이 생각이 나는 분위기인데 나는 그들을 보는 게 더 신기했다. 


참새가 방앗간 들리듯 다음으로 용산을 거쳐 남영동에  몇 군데 가게를 살짝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같이 걸으면서 아이들 얘기, 우리 미래에 대한 얘기, 소소한 일상에 대한 얘기 그리고 빼놓지 않고 내년엔 결기주간에 뭘 할까 하는.


평범하지만 올해도 즐거운 결기주간을 보냈다. 가족들과 보내는 매 시간이 소중하지만 특히 아내와 보내는 결기주간은 참 즐겁고 행복하다. 


여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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