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 셋째주, 시언 : 무분별한 친절(上)

겨울호 세번째 주제 : 친절

by 어느 저자

“이거 네 이름 맞아?”


큰맘 먹고 들어선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앞 매표소 직원은 팔짱을 단단히 낀 채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얘기했다. 비싼 입장료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국제학생증을 내밀었는데, 기대했던 입장권 대신 학생증 한 편에 한글로 쓰인 내 이름을 가리키며 의심 가득한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여태껏 학생증을 꺼내 들었던 많은 순간 중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기에 당황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음... 옆에 사진 봐봐. 나랑 같지?”
“그래서 이게 네 이름인지 어떻게 아냐고.”

이렇게까지 나올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딱딱한 반응이었다. 당황스러움이 당혹스러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잠시 대답할 말을 찾으려 벙쪄있다 혹시 몰라 챙겨왔던 여권이 생각났다.

“이거 봐봐. 이게 내 여권인데, 여기 적힌 글자가 내 이름이야. 네가 한글은 모르겠지만, 이 글자가 학생증에 적힌 글자와 같다는 건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름 기발하게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이쯤 했으면 의심 없이 입장시켜주겠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매표소 직원을 바라봤는데, 직원의 얼굴에는 이미 비웃음이 가득했다. 그 직원은 옆자리에 앉은 다른 직원에게 그리스어로 뭐라 얘기하면서 내 여권을 가리키더니,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선 펜을 들어 빈 종이에 무엇인가 써서 내게 내밀었다.

“너 이거 한 번 읽어봐.”

그리스어로 적힌 그 단어는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좋지 않은 말임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읽지 못하고 멀뚱히 자기네들을 쳐다보자 뭐가 웃긴지 큰소리로 신나게 깔깔대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내가 인종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생각해보니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이름이 네 이름인지 어떻게 아냐’니. 입국 심사관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질문이었다. 뒤에 서 있던 어느 백인이 큼큼하고 헛기침하지 않았으면 한참을 그 자리에서 얼굴을 붉히며 서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붉어진 얼굴을 보고 더욱 신나게 낄낄댔을 매표소 직원들의 표정이 상상됐다. 손에 쥐어진 애꿎은 입장권만 뚫어져라 노려보다가도 할인을 받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는 내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해는 뜨거웠고, 애석하게도 하드리아누스 도서관은 아무것도 볼 게 없었다. 부서진 유적 잔해 위에 앉아 방금 전 상황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해야 했어야 할 말과 행동들을 수십 번 시물레이션 돌려보다가 허탈해진 마음으로 유적지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더 이상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구글맵을 켜서 숙소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경로를 검색하려는데, 근처에 노란별이 띄워진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블로그에서 보고 ‘즐겨찾기’에 추가해둔 칵테일 바였다. 아테네의 도심 시내가 한눈에 잘 보인다는, 가장 아름다운 뷰를 가진 곳이라는 그 장소. 내게는 너무 비싸 도저히 갈 수 없었던 그 칵테일 바였다.

‘그래 기분이라도 달래자.’

평소 같았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아테네를 미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고급스럽게 각인된 간판 아래 멈춰서니 나의 빨간 색 천 바지가 검은 유리벽에 비치고 있었다. 오늘따라 더 해어진 것만 같은 옷차림이 조금 창피했지만, 조금 전에 멀뚱히 서 있던 나보다는 덜 창피하다고 생각하며 회전문을 힘껏 밀고 들어갔다.
가게에선 재즈 음악이 낮게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이미 여러 연인과 가족들로 북적거렸다. 쭈뼛거리며 서 있는 내게 근사한 정장을 입은 종업원이 다가와 혼자 왔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종업원은 바텐더와 마주 보는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비어있는 창가 자리를 바라보는 내게 바텐더는 웃으며 검은색 메뉴판을 건넸다. 그러고선 내 눈을 마주치며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했다. 으레 몸에 밴 친절이겠지만 정반대의 눈 맞춤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인종에 따라 달라지는 친절과 칵테일을 사면 베푸는 친절. 둘 중 어떤 걸 고르겠냐고 하면 유색인종인 나는 당연히 후자를 고르겠지만, 내가 돈이 없는 유럽인이었다면? 돈도 없고 피부색도 어두운 평소의 나는 아테네에서 어떠한 친절도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돈이 있는 날이니 조건을 충족한 친절을 다시 한번 얻고자 바텐더를 불렀다.

“여기서 제일 맛있는 칵테일이 뭐야?”

바텐더는 예의 친절한 말투로 메뉴판 가장 아래에 적힌 칵테일을 추천했다. 라즈베리나 코코넛 같은 재료들에 대한 설명과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칵테일이라는 말도 잊지 않으면서. 하지만 그 옆에 쓰인 가격은 친절하지 않았다. 부담스러운 바텐더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가장 싼(그럼에도 비싼) 칵테일을 주문하고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비어있는 자리 뒤편으로 보이는 뷰는 확실히 근사한 광경이었다. 아크로폴리스까지 오르는 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아테네 도심의 모습을 가득 담고 있었고, 주황색 지붕과 옅은 베이지색의 유적지들이 고대 그리스의 모습을 상상하게 했다. 고개를 쭉 빼고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하드리아누스 도서관에 시선이 멈췄다. 앞서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이 도시가 이방인에게 대하는 태도는 어떤 것이 진실일지를 생각하다 멍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나온 칵테일을 단숨에 들이켰다. 물 한 컵보다도 작은 칵테일에서는 어쩐지 쓴맛이 더 진하게 나는 듯했고, 나는 금세 얼굴이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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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와서 겨우 구한 닭고기로 늦은 저녁을 해치우고는 방으로 올라갔다. 18인실의 좁아터진 방. 마치 닭장처럼 우글우글 거리는 침대들 사이를 지나 내 자리로 몸을 던졌다. 이 도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괴롭게 만드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씁쓸한 마음이 온몸을 잠식하게 내버려 뒀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려는데 시끌벅적한 소리에 눈을 떴다. 오늘 아침에 막 알게 된 영국에서 온 데이빗은 뭐가 신나는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같은 방을 쓰는 친구들 여럿과 루프탑에서 맥주를 마시고 내려오는 길이라던 데이빗은 내게 펍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어젯밤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은 프랑스인 친구와 말이 많던 러시아인 친구가 옆에서 거들었다.

“미안해.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은 기분이야.”

다행히도 몇 번의 경험 덕에 나는 거절 하는 법을 알았다. 데이빗은 어깨를 으쓱하며 길 건너 시샤 바에 있을 테니 언제든지 와도 좋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곳에서 처음 겪는 진심이 담긴 친절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들고 숙소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불이 켜진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보았다.

맞다. 늘 행복할 순 없는 거다. 늘 내게 친절한 사람만 있진 않을 것이다. 이런 순간이 있을 거라는 것도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한 것과 직접 닥친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 있어도 대처하지 못 하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지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있을 수 있고, 인종차별이나 무차별 폭행과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나는 그냥 당할 수밖에 없다. 지진이 나를 덮치면 죽을 수밖에, 홍수가 나면 집과 재산을 잃을 수밖에, 인종차별을 당하면 그냥 무시할 수밖에, 슬픈 기분에 사로잡히면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을 수밖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어떡하랴. 다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달라고 빌 수밖에. 여기는 그리스니까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빌면 되려나? 저 반짝이는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에 있을 신들이 내 얘기를 듣고 있다면 하나만 들어주면 좋겠다. 부디 내가 저들과 같은 편협한 사고를 가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내가 같은 행동을 하게 되면 나를 벌해달라고. 대신 나를 우습게 아는 이들도 벌해달라고, 친절은 바라지도 않으니 나를 함부로 하는 이도 없게 해달라고.

탁.

그리스의 신들에게 기도를 가장한 호소문을 마구 올리는 중인데 누가 눈치도 없이 훼방을 놨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보니 웬 백발의 할아버지 한 분이 옆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아차. 숙소 주인인가? 루프탑에서 내려오라는 건가? 노랫소리를 너무 크게 틀었나? 할아버지에 대한 여러 추측이 오가는 찰나,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품 안에서 맥주병 하나를 꺼내더니 나를 향해 기울였다.

나의 아테네를 구원해줄 구원투수, 닉 할아버지의 등장이었다.


-하편에서 계속

from. 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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