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 셋째주, 은희 : 모래성과 두꺼비집

겨울호 세번째 주제 : 친절

by 어느 저자

나는 대개 타인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노력한다는 말을 태생적으로 친절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인데, 그럼에도 노력하는 이유는 학창 시절 아르바이트부터 전공, 직업까지 서비스 업계에 오래 발을 담갔던 사람의 습관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습관이라는 모래는 쌓이고 쌓여 거대한 성을 만들었고, 대부분의 곳에서 나는 '친절한 사람'으로 남고는 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성에는 큰 단점이 존재했는데, 앞서 말했듯이 성의 기반이 모래라는 점이다. 아무 이상 없어 보이는 성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뒤편에는 지속해서 몰려오는 파도와 바람으로 인해 무너지고 다시 짓는 상황을 끝도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며칠 전 일이었다. 며칠째 과도한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이다 못해 흘러넘칠 정도였고, 그날도 꾸역꾸역 속으로 삼킨 채 집으로 들어섰다. 따끈한 저녁상에 앉아 부모님과 밥을 먹는데, 무릎에 앉아 있던 강아지의 털에 뭐가 묻어 떼어주려는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뭐가 그리 예민했는지 강아지는 내 손을 물어버렸고, 그 순간 무언가가 빵- 하고 터져버리고 말았다.
쨍그랑- "아, 밥 안 먹어!"
들고 있던 젓가락을 던지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밖에서 부모님의 당황하는 대화가 들렸지만 당장 마음을 추스르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손가락을 감싸 쥐고 있는 화장지는 점점 붉게 물들어가고, 정신과 마음속도 이미 후회와 죄책감으로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진정이 되고 나니 생각나는 건 회사에서의 내 모습이었다. 가끔 짜증은 낼지라도 어색하게나마 웃는 모습이, 나름의 친절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그리고 이어 차곡차곡 쌓아온 스트레스와 짜증을 아무 상관 없는 부모님에게 쏟아버린 내 모습이 생각이 나버렸다. 차마 걸어 잠근 문을 열고 나갈 수 없었다.

나의 친절은 농도라는 게 존재해 아무리 같은 친절이라도 거리감에 따라 농도가 옅어지기도 짙어지기도 한다. 똑같은 친절이라도 타인의 친절은 감동이 되고 친밀한 사람의 친절은 당연시된다. 이 농도는 받을 때 말고 행할 때 또한 거리감에 따라 달라지고는 했는데, 밖에서든 안에서든 툭하면 짜증을 내는 요즘의 나조차도 적당한 가식과 웃음을 짓는 회사와 달리 집에서는 없는 짜증이라도 부리고 다닌다는 점이 예라면 예일 것이다. 거리감이 좁아질수록 친절이라는 녀석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고, 대신 무례함이라는 녀석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나도 모르게 쌓였던 스트레스가 아무 상관 없는 친밀한 사람들에게 무례함이라는 불통으로 이리저리 튕기는 것이다. 친절과 무례함은 상반되는 것 같으면서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맞대어있어 상황에 따라 금세 뒤집어버린다.

왜 거리감에 따라 친절의 농도는 달라지는가. 왜 유독 친밀한 사람에게만 무례함이 불쑥 찾아오는가. 아마 ‘당연히’ 이해해줄 거라는 멍청한 착각에 의해서일 것이다. 당연히 나의 상황과 감정을 알아줘야 한다는, 당연히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는, 그런 당연하고 이상한 확신. 나조차도 나를 모르고 남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주제에 상대방에게는 이해를 요구하는 그런 이기심.

그동안 나는 휘황찬란하고 거대한 성의 외면만을 바라본 채 정작 그 성의 기반이 모래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외부인의 찬양만을 받아드리고, 거센 파도와 바람으로 인해 무너지는 뒤편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지켜나간 내부인을 나 몰라라 한 채. 그렇게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을까. 그런데도 곁에 남아 있는 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겼을까. 와르르- 성이 무너져버렸다. 거대하고 아름답던, 친절이라는 가식을 두르고 있던 그 성이 결국 무너져내렸다. 흩어져 가는 모래 산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내미는 이 손들은 이제 어찌하면 좋을까.
차곡차곡 다시 한번 두 팔 걷어 모래를 쌓아야겠다. 거대하지 않으면 어떤가. 아름답지 않으면 어떤가. 하나둘 천천히 쌓아 올라 어떤 집보다도 단단한 두꺼비집을 만들어야겠다. 그들이 더는 거센 파도로 인해 무너지는 성을 보며 슬퍼하지 않도록, 그들이 더는 거친 바람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지 않도록. 자신들의 상처보다 나의 슬픔에 먼저 손을 내미는 이 사람들에게 또 다른 친절이라는 단단한 두꺼비집을 만들어줘야겠다.

from.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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