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 셋째주, OHMJ : 친절에 대한 고찰

겨울호 세번째 주제 : 친절

by 어느 저자

우리가 생각하는 친절이 친절일까?

친절에 관한 글을 쓰다가, 문득 친절이란 무엇인가, 기원은 어디일까 등 고찰을 하다 생각을 정리해 봅니다. 주관적인 관점이고 정확한 정보전달을 위한 글이 아님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친절이란 무엇일까? 많이 쓰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정확히 정의하기가 힘들어서 사전에 검색을 해보니, 친절 - 대하는 태도가 매우 정겹고 고분고분함. 또는 그런 태도. 사전적 정의 자체도 애매모호해서 스스로의 정의를 내리기로 했다. 나는 친절을 ‘인간이라는 동물의 생존전략 혹은 투자’라고 정의한다.



1.친절의 기원


친절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사실 이 질문은 역사적으로 많은 위인들이 고민해왔던 질문과 뿌리를 같이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친절과 함께 도덕, 선, 이타주의, 동정, 연민, 성선설, 성악설 등등 인간만이 가진 이 독특한 감정을(사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의하려는 많은 위인과 주장을 배웠다. 하지만 이는 이미 우리의 사회가 문명에 접어든 후의 생각이다. 나는 좀 더 먼 태초의 친절을 고민해 봤다.


원시 인류에서, 진화 생물학적 관점에서 이렇다 할 물리적 생존 무기가 없는 유인원은 자손을 더 빠르고 많이 남기기 시작했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대신 거둬주기도 했으며, 결정적으로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을 무기로 선택했다(사실 그런 원시인류만이 살아남았다는게 더 정확하다). 개체간의 먹이경쟁, 짝짓기 경쟁 등을 줄이고, 힘을 합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존전략으로 평화와 공존을 선택한 만큼 서로에게 친절이 ‘필요’했을 것이다. 종의 생존과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서로를 배려해야했으며 때로는 본인이 손해를 보더라도 친절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배타적이며, 본인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 성향’의 개체들은 공동체를 이루는데 있어서 당연히 환영받지 못했고,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적자생존. 그럴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인류만이 살아남았고, 그 결과로 우리의 유전자에는 먼 옛날 살아남은 선조들로 부터 온 친절의 근원이 있을 것이다.


너무 아득히 먼 이야기 같아 하나의 얘기를 덧붙이자면 중앙아시아, 몽골등 비교적 척박한 환경에서 목축업을 하며 사는 나라들의 공통적인 문화로 손님을 귀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다. 이는 척박한 환경에서 집을 떠나와, 도움이 없다면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인데, 이는 위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언제라도 내가 손님이 될 수 있는 환경에서 서로의 생존을 위해 생겨난 문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2.친절과 투자


우리는 친절을 아무 대가 없이 남을 위해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위의 두 가지 예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친절과 거리가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는 베푼 친절에 돌아오는 대가가 전제되어 있어서 그렇다. 우리는 친절이란 항상 대가 없이 남에게 베풀어야하고, 항상 착한일이며 선한일이라고 배우지만, 사실 우리가 행하고 있는 친절은 그렇지 않다.


‘내가 행하는 친절은 그런게 아냐’라고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사회에도, 본인에게도 만연한 일들이다. 대부분의 친절에는 ‘기브 앤 테이크’의 생각이 깃들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금전적 혹은 물리적인 이득을 얻기 위하는 목적 뿐만이 아니다. 심리적인 이득(착한일을 했다는 만족감, 도덕적 규범을 어기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얻기 위함도 크다.


한 주제에 대한 의견이 모호하지만 좁힐 수 없다면 그 상황을 극한으로 밀어보면 답을 얻을 수 있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처벌과 어떠한 이득도 일절 없으며 도덕과 선, 옳고 그름등을 배우지 않은 상태이고, 같은 종의 보존을 위해 따위의 생각이 없는 상태라면, 당신은 기꺼이 자신의 무엇을 내줄수 있는가? 오히려 약한 상대가 가진 무언가를 탐하지 않겠는가? 본디 인간은 동물이다. 우리의 이성은 본능을 아슬아슬하게 통제할 뿐, 이길 수는 없다. 사회 규범, 법등의 존재는 그런 인간의 추악함을 경계하기 위한 방법이다. 혹시나 정말 대가없는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한다면, 도덕적 성취감, 종교관, 혹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교육과 문화가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보기 바란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런 긍정적이지 않은 친절과 선을 동일시 할까? 그건,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과 이 사회의 붕괴를 막기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가정해보자. 우리가 다 큰 어른이며, 어린아이보다 훨씬 강한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어린아이가 과자를 사러가는 돈 쯤이야, 한대 쥐어박아 빼앗을 수 있다. 얼마나 간단하고 편한가? 최소 몇 분, 몇 시간을 일해야 가질 수 있는 물질을 단 한번의 위협으로 가질 수 있다면, 당연히 그 길을 택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까? 바로, 우리에게 교육되어 온 것들이 돈을 빼앗지 않도록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 배워왔고, 그것을 넘어 사회규범에 따라 처벌을 받을 수 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의 사회가 붕괴되지 않게 친절과 처벌을 사용한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은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에 ‘친절’ 이라는 투자가 수반되지 않으면 무법의 약육강식의 사회를 초래할 수 있음은 어렵지 않게 추론이 가능하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나는 항상 절대적인 강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 공동체의 파괴 즉, 규범이 파괴되는 일은. 키가 2미터쯤 되고 몸무게가 세자리쯤되는 강한 사람 앞에 나도 언제라도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막기위해 친절을 ‘선’으로 합리화하여 우리 스스로를 보호해야하는 명분이 충분하다.


이렇게 사회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이 나를 위하는 일이 되고, 우리는 그 공동체 유지를 위해 ‘투자’한다. 눈앞의 작은 이득이 아닌 공동체 유지에서 오는 나의 생존과 보호가 더 큰 이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가 있는 친절을 베푼다. 친절에 대가가 전제된다는 점이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친절이 될 수는 없다. 친절은 또 다른 친절마저 원하지 않아야 하니까. 친절에 대가가 전제된다면 이미 그 마음은 친절이라 부를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친절을 베푸는게 아니고 사회공동체를 위한 투자를 하고 있다.


종합해보자면, ‘친절은 유전적인 본능으로 전햬져 내려오다, 최근 종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의 위험이 없기 때문에, 공동체 유지를 위한 투자의 개념으로 본능이 아닌 교육에 의해 그 맥이 끊기지 않고 있다’ 정도로 정리가 가능하다. 또한, 우리가 친절이라 생각하는 ‘친절’의 의미는 사실 텅 비어있는 허무맹랑한 소리로 보인다. 지금껏 우리는 인간의 생존수단이었던 친절을 그저 필요에 의해 생각없이 따르는 삶을 살아오던 것이다.


3.현재의 친절


지금의 친절은 어느모습이고, 어떤 위치일까. 요즘은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그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친절은 위기에 빠져있다. 함부로 친절을 베풀었다가 그 점을 역이용 당하는 경우, 친절한 사람들을 이용해서 본인의 이득을 챙기는 경우 등등 친절하면 도태되기 쉬운 사회의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이는 점차 집단간의, 개인간의 마음의 거리를 벌리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악해서가 아니다. 생존과 진화앞에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게 이제는 인간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남은 방식을 되풀이 하는 중일 뿐이다. 그 일환으로 친절이 사라지고 있다. ‘친절’ 덕에 살아남았고 이제는 ‘친절’ 때문에 죽어가는 우리의 사회가 안타깝다.


그렇다면 진정한 친절이 될 수 없는 우리의 친절들을 그만 두어야 할까? 친절의 교육 (여기서 말하는 교육이란 거창한 일이 아니다. 친구와 사이 좋게 지내라 혹은 몸이 불편한 친구가 있으면 도와주어라 등의 보통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내용들과 학교에 가서 배우는 사회의 규칙들에 섞여들어 우리도 모르게 교육되고 있다.)을 그만 두어야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이 글에서 다룬 내용들이 다소 공격적이고, 불편하게 읽히지만, 우리가 그렇게 진화해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일 뿐이다. 또한, 아직도 그 친절에 의해 살아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생존의 위협이 다른 인간 밖에 존재하지 않아 필요 없어진 친절의 모습이 아닌, 우리만의 친절의 정의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절의 모습도 우리와 함께 진화할 시기가 온 것이다.


친절이란 진화와 생존이라는 근본적이고 거대한 흐름에서 생겨난 인간의 생존전략이지만, 나 역시 ‘친절’ 덕분에 살아남았기 때문일까? 친절이 선도, 악도 아닌 생존수단이라고 쓰면서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친절의 기원이란 그저 생존을 위한 투자일 뿐이었지만, 우리는 새로운 친절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이유를 묻는다면, 이젠 서로를 향한 생존의 칼날이 언제 본인을 향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텅 비어버린 친절은 뒤로하고, 우리의 진정한 친절과 그 범위를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나를 위해서 베풀던 친절이 진정으로 남을 위하게 된다면, 악순환으로 바뀌어 가는 친절의 모습이 아닌 선순환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어 우리는 다 같이 친절로써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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