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 일곱번째 주제 : free(자유주제)
#1
(Intro BGM, 잔잔하고 밝은 음악, 조명 켜지면서 음량 줄어든다.)
나는 무대 중앙에 서서 독백을 한다.
나 : 사람들은 보통 여행을 삶의 쉼 또는 목표로 많이 삼아요. 괌의 에메랄드빛 푸른 바다를, 뉴욕의 반짝거리는 바쁜 거리를, 볼리비아의 두 개의 하늘이 펼쳐진 소금사막을 그리면서 말이죠. 실제로 가본 사람만 그 황홀함을 알아요. 그리고 삶에 대한 의욕이 생기죠. 그다음 여행지를 위해서 돈도 모으고, 여행에서 죽을 고비도 넘겨보고 해서 이제는 웬만한 어려움 정도는 부딪혀볼 용기도 생기고, 다른 사람들과 이 나라는 하늘이 이렇니 저 나라는 바다가 이렇니 하는 대화도 하고.
저는 그런 사람들이 참 부러웠어요. 무엇보다도 그 여행에 ‘미쳐’있는 게 부러웠어요. 과거에 보았던 내가 모르는 풍경들과 그 장소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눈 여럿이 온통 담겨있는 추억에 미쳐있었고, 자신이 가보지 못한 곳을 그리며 온통 마음이 뺏겨있죠. 그럴 때면 나는 생각해요. 나는 여행이 취미이거나 목표가 아닌데, 그렇다면 내가 어떠한 것에 미쳐서 좋아해 본 적이 있을까? 내가 뜨겁게 추억할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잠시 말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하다, 생각난 듯 웃음 지으며 무대 앞을 본다.)
저도 어디엔가 미쳐있을 때가 있었네요.
(BGM 커지면서 암전)
#2
(Intro BGM 페이드 아웃, 2010년도 유행 노래 페이드 인.)
18년도 여름. 20세의 나는 머리가 길고 자글자글하게 파마를 했으며, 포니테일로 길게 묶었다.
대강당 뒤쪽 음향기기에서는 신나는 음악들을 틀어 스피커와 연결해놓았다. 넓은 대강당에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 빵빵하게 울린다. 연극부 동기들과 선배들이 무대 위 또는 바로 앞에 다 같이 서서 와글와글 떠들며 춤을 춘다. 클럽 춤이나 다른 멋있는 춤이 아니라, 온통 어디서도 보지 못한 막춤뿐이다. 홍보영상을 만들기 위해 몇 명은 그것을 찍고 있고, 춤을 추지 않는 친구들은 자리에 앉아 그 광경을 낄낄거리며 보고 있다.
음량 작아진다.
과거의 나 : (옆에서 함께 춤을 추던 동기들 및 선배들과 헐떡이며) 와 진짜 땀난다. 연습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땀 빼면 안 되는데. 발성연습 한 거를 연극에다 안 써먹고 놀 때 목을 다 써버린다니까?
모건 : (계단을 내려오며 나에게 핸드폰을 보여준다) 레전드 영상 하나 건졌다! 이거 홍보영상에 넣어야지 흐흐
과거의 나 : 뭔데? 보여줘. (영상 속 나는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함께 우스꽝스러운 춤을 춘다) 야 안돼!!! 지워, 지우란 말이야! (도망가는 모건을 잡으러 쫓아간다. 그러나 두 사람 다 한가득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고, 그것을 보는 부원들 모두 깔깔대고 있다.)
나 : (오른쪽 무대에 스포트라이트. 전체적으로 무대는 어두워진다. 무대에서는 모든 부원이 바삐 움직이고, 그러면서 미소는 잃지 않는다) 우리 동아리는 매일 저녁 10시부터 12시까지 연극연습을 했어요. 하루 2시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우리는 연출진, 배우진, 스태프 모두 약속한 듯 1시간에서 30분 일찍 와서 함께 춤을 추거나 장난을 치며 놀았어요. 그때 저희가 준비하던 연극이 청춘코미디였기 때문에, 분위기도 풀고 텐션을 높이기 충분했죠.
그리고 연습이 다가오면, 이상하리만치 다들 진지해졌어요. 웃음기가 잦아들면서 스태프들은 음향과 조명을 점검하고, 수정하고. 연출진들은 스태프들과 함께 회의하거나, 대본상 수정해야 하는 부분을 배우진과 이야기했어요. 배우들은 챙겨야 하는 소품을 다시 점검하고, 어제 잘 외워지지 않았던 대사를 연신 읊으며 각자 빙글빙글 걸어 다녔어요. 발성연습도 했고요. 이렇게요.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 나!냐!너!녀!노!뇨!누!뉴!느!니!”
(스포트라이트 꺼지고 무대 다시 밝아진다.)
연출 : (대본 노트를 말아 한 손에 들고 소리치며) 오늘 연습 시작해보겠습니다! 3씬부터 갈게요!
과거의 나, 배우들 : 넵! (배우들 바삐 움직이며 자리를 잡고, 음향 및 조명은 기기를 점검한다.)
암전
#3
동아리 부원들이 동그랗게 앉아있다. 모두 대본을 들고 넘기면서 각자의 피드백을 한다. 무대 위의 시계는 벌써 12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연출 : … 그래서 나는 민재가 그때 좀 더 과장되게 애교를 부려줬으면 좋겠어.
과거의 나 : 네에?! 여기서 더요??
부원들, 모두 웃는다.
연출 : 하하, 힘들겠지만 느낌을 더 살리려면 그게 좋을 것 같아.
수지 (음향) : 아 그리고 저 질문이 있는데, 여기 이 부분에서 대사는 일부러 짧게 치는 건가요?
호재 (배우) : 어? (대본을 본다) 그거 내가 대사를 잘 못 쳤네.
수지 (음향) : 그러면 여기는 좀 더 정확히 해주세요! 저희가 이다음에 효과음을 틀어야 해서 타이밍을 정확히 잡아야 하거든요.
재승 (배우) : 그리고 그 다음 부분에 조명 떨어지는 거. 뭔가 핀 조명보다는 스포트라이트가 더 좋은 것 같지 않아?
주미(조명) : 그럼 지금 한 번 올라가서 그 씬 한번 바꿔서 가볼까요?
민창(조명): 근데 스포트라이트 저번에 만져봤는데, 고장 났어요.
부원들, 다들 탄식한다. 몇 명은 또? 하며 놀란다.
한은(무대감독) : 동아리 회비로 동아리 자체 조명 사면 안 되겠죠? 돈이 너무 많이 들겠죠?
유빈 (소품) : 아무래도 그렇지…. 가난한 동아리다 정말! (째깍째깍 효과음, 전체적으로 무대 어두워지고 스포트라이트 아래 나를 비춘다.)
나 (나레이션) : 원래라면 12시에 파해야 했을 자리인데,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모두가 함께하는 피드백이 이어졌어요. 연출이 배우 또는 스탭에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배우가 스탭에게 스탭이 배우에게 상호간의 피드백이 이어졌어요. 더 좋은 연극을 만들기 위한 열정적인 회의였죠. 가끔은 이 회의가 너무 길어져서, 새벽녘이 되어서야 나서기도 했어요.
전체적인 무대 조명 다시 밝아진다. (마치 경비아저씨가 불을 켠 것처럼 빨리 변화)
경비아저씨 : (갑자기 들어오며) 저기요! 지금 다 나가셔야 해요!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연출 : 아, 네!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원들을 향해) 우리 오늘 회식할까? 막걸리 어때!
부원들 : 오오~~ 좋아요~!~! (우르르 나간다)
과거의 나 : (발걸음 빠르게 나가는 아이에게 달려가 물어본다) 너도 회식 갈 거지? 가자!
(부원들 모두 나가며 동시에 암전, 경쾌한 음악 페이드 인으로 크게 들어왔다가 줄어든다.)
(스포트라이트 켜진다.)
나, 무대 중앙에 선다.
나 : 그때의 나에게 대학교 공부는 뒷전이었어요. 대신 나의 성취감은 바로 여기, 연극에 있었어요. 연극에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서 으쌰으쌰 힘을 합치고, 실제로 진행이 되는 과정이 짜릿했어요. 각자의 자리에서 그 역할을 해내기 위해 개개인의 피나는 연습도 있었고, 그 결과로 날로 완성이 되어가는 것들이 다음 날의 연습에서 보였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좋은 아이디어가 될 수 있으니 숨기지 않고 다 쏟아내기도 하고요. 자신의 포지션이 어디든지, 새벽에 몇 시가 되든지 전혀 상관없다는 듯 계속! 저는 이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미친 사람들 안에 저도 포함되었다는 게 벅차오르게 기뻤습니다.
(말을 잠시 멈춘다. 음악 페이드 아웃)
공연 당일이 다가오고, 부원들은 주말 양일을 모두 바쳐서 무대 설치를 도왔어요. 팀을 짜서 프레임을 설계도대로 조립하고, 그 위에 벽지를 붙이고, 문도 설치하고, 무대에 고정을 하고, 그 무대를 꾸미고. 가장 힘든 날이니만큼, 평소보다 더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여전히 춤을 추며 진행했어요. 뭐니뭐니해도 대강당 바닥에 둘러앉아 먹는 짜장면은 세상에…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은 정말 맛이 없고 불다 못해 떡져버린 짜장면이었는데, 그래도 우리에겐 꿀맛이었어요. 힘들게 노동한 뒤의 음식이 뭔들 안 맛있겠습니까? 또 그 분위기와, 투닥투닥 장난과, 청춘들의 묘한 핑크빛 기류, 텐션을 위해 틀어놓은 2010년대 댄스 가요와, 우정과, 더운 여름의 땀방울까지 함께 먹었던 거죠. 그러니, 아무리 맛이 없어도 그때의 우리에겐 최고급 만찬이었어요.
거 참,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그야말로 `여름이었다` 네요. 몇 번의 리허설을 거쳐서, 이제 무대에 오를 준비만 남았습니다!
나, 미소 지으며 퇴장, 암전
#4
약간 어두운 조명, 무대 뒤에 있는 배우들 모두 교복을 입고 있다.
과거의 나 : 언니, 나 너무 떨려. 어떡해? 실수하면 어쩌지. 대사, 대사 까먹을 것 같아! 빨리 다시 봐야지.
의영 : (과거 나의 어깨를 잡으며) 워- 진정해! 잘할 수 있어. 지금까지 잘 해왔던 것처럼. 그리고 뭐 망하면 어때! 후딱 해버리자고 ~
수찬 : 맞아. 물 좀 마시고 (생수를 건넨다), 심호흡하고, 소품 순서만 잘 생각해.
호재 : 마~ 잘할 수 있다~
과거의 나: (수찬이 건네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심호흡을 한다) 후…. 좋아!
재승 : (밖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 자, 그럼 연극 시작합니다!
(박수 및 함성과 함께 인트로 음악이 페이드 인)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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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인 상태, 대사만 들린다.
과거의 나: 언니, 나 어떡해? 나 순서 까먹어서 의상 잘못 입고 나갔어…. 아아 어떡해….
의영: 아니야, 아니야 민재야. 진정해. 지금 실수한 거 되뇌다 보면 앞으로 남은 극도 힘들어질 거야.
재승: 그래, 기왕 실수한 거! 마음 편하게 잘 연습하던 대로 끝내보자!
과거의 나:…. 그래! 우리 잘 마무리 지어봐요!
#5
무대 앞에 연출진, 배우진, 스태프 모두 모여 서 있다.
연출 : (마이크 잡고) 여러분, 재밌게 보셨나요? 네, 저희도 여러분을 재밌게 보았습니다. (웃음) 이번 극은 고등학생 친구들의 청춘 드라마였습니다. 아직 꽤 덥네요. 다들 이번 학기 시작이 이번 저희의 연극처럼 맑고 희망찼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저희는 ~
부원들 : 가막골 으뜸 극단, NEST !
(아웃트로 음악과 함성과 박수 소리 페이드 인 후 페이드 아웃, 스포트라이트)
나 : 그 두 시간의 장정이 끝나면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따라와요. 방학을 바쳐 만든 나의, 아니 우리의 연극. 후련하기도, 미련이 남기도 하고, 함께 한 친구들에게 미안하기도 고맙기도, 스스로가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다 같이 동아리 이름을 외치고, 많은 사람에게 박수를 받을 땐, 주마등처럼 우리가 힘들게 조금씩 맞춰나갔던 그 과정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우리가 해냈다! 라는 그 짜릿함을 무대에서 한 명 한 명 느끼고 있으니, 그 작은 진동들이 온 무대를 울리고, 내가 두 발로 디디고 서 있는 이 무대가 울리니 장기를 타고 올라와 나를 울리는 것입니다.
꽤 그럴듯한 연극이 펼쳐지기 전의 그 과정들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사이사이에 스며들어있던 우정과 사랑, 연극에 미쳐있었던 순수한 열정, 기쁨과 슬픔 또는 분노를 한 데 모아 꽉꽉 담아 내 중심 안쪽에 고이 두고 살아가고 있네요. 가끔 힘이 들 때면 주섬주섬 꺼내어, 하루라는 밥에 기막힌 반찬 삼아 한 그릇 뚝딱 해버립니다. 그 하루가 맛이 있든 없든 간에 추억이라는 게 있으면 꿀맛이니까요.
그러니, 저도 여행자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새로운 극을 올리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만드는 중에 예측할 수 없는 일이나 실수가 생기면, (잠시 멈추고 씨익 웃으며) 뭐 어때?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해결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머리 맞대고 고민하거나, 또는 무시하고 앞으로 남은 걸 잘해내야지 하는 다짐을 하는, 조금이나마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 여기 이렇게 서 있네요. 그렇게 연극과도 같은 이 인생을 여행한 것입니다. 내 사람들과 한데 모여 내 이름을 외치며 박수받는 인생이라는 연극에 끝이라면, 그것참 잘 된 연극, 잘 된 여행, 잘 된 인생 아닙니까?
(조명 점점 페이드 아웃, Outro BGM 페이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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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 하랑소년
작가 : 하랑소년
주연 : 하랑소년
from. 하랑소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