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식 그립지 않냐는 외국인들의 질문에 저는 항상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전혀.’ 이제 집 떠나 떠돌아다니는 생활에 익숙한 데다 입이 짧지 않아 현지 음식에 바로 잘 적응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곳 멕시코에서도 매일 또르띠야 (옥수수 가루로 만든 얇은 전병)에다 멕시코식 매운 살사를 듬뿍 얹어 끼니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나름 ‘세계의 시민’이라고 생각하며 우리나라 문화와 동떨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미치도록 그리운 한국 물건이 생겼습니다. 라면, 고추장, 김, 화장품도 아닌 바로 ‘양말’입니다.
여러분은 여행 준비를 할 때 무슨 물건을 제일 걱정하시나요? 저는 보통 화장품을 꼼꼼히 챙겼습니다. 한국 제품의 질을 따라갈 해외 화장품을 찾기 어려운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초 케어 제품을 기본 두세 통 이상 두둑하게 담았습니다. 우리나라 전유물인 선스틱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짐을 쌀 때 양말의 개수도 신경을 썼습니다. 하지만 화장품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습니다. ‘빨래를 자주 할 수 없을 테니’ 일주일치는 넉넉히 챙기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녔습니다.
이상하게 저는 양말을 한번 사면 몇 년은 족히 신었습니다. 구멍이 나는 일도 잘 없었을뿐더러 이상하게 남들처럼 빨래를 돌리다 한 짝 씩 잃어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여행을 하다 갑자기 외국에서 양말을 사기 위해 쫓아다닐 일이 없었던 것이지요. 한국에서 들고 온 것만으로도 항상 충분했습니다. 그러다 세계 떠돌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달리기’를 진지하게 시작하면서 사달이 났습니다. 격렬한 발놀림 탓에 스니커즈용 짧은 양말을 신을 수가 없어 일단 제가 가져온 것의 절반은 무용지물이 됐습니다. 남은 절반마저 지면과의 과한 마찰 탓인지 밑바닥이 해져 생명을 다했습니다.
‘이깟 거, 장 보러 갈 때 몇 켤레 사면 되지.’ 저는 쉽게 생각했습니다. 유명 스포츠 매장에서 러닝용을 구매하면 좋겠지만 궁핍한 떠돌이의 주머니 사정상 그건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평소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노점이나 길거리 액세서리 판매점에 들러 만원 한 장에 수 켤레를 집어올 생각이었습니다. 발목을 덮되 무릎을 닿을 정도로 과하게 길지는 않고, 색상은 밋밋한 검정 파랑보단 짙은 파스텔 계열이 좋겠다고 미리 원하는 디자인도 다 정해뒀습니다. 알고 보니 참 쓸데없는 고민이었습니다.
일단 판매대를 찾는 건 쉬웠습니다. 시장에, 슈퍼마켓에 그리고 길거리에 우리나라처럼 각양각색의 양말이 널널이 깔려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질’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어디 한 군데 올이 풀려 있는 것처럼 하나같이 다들 촉감이 흐물흐물했습니다. 그렇다고 부드럽다고 말할 수도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천을 만지면 ‘기분 나쁘게’ 손가락이 미끄러진다고 할까요. 나름 가격이 있는 제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발을 넣으면 걸음걸음마다 신발과 어울리지 못하고 발이 헛도는 게 눈에 바로 그려졌습니다.
그 후 저는 본격적으로 ‘양말 사냥’을 떠났습니다. 국산품처럼 적당히 탄력이 있어 발에 착 감기면서도 발목을 너무 조이지 않는, 더불어 너무 쨍하지 않은 부드러운 색상을 가진 것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이런 퀄리티를 말로 설명하기에는 제 스페인어가 너무나도 짧았습니다. 저는 직접 한국 양말을 신고 길을 나섰습니다. 이제 와서 글로 묘사하자니 조금 부끄럽지만, 제가 매장에 들어가서 한 것은 바로 이랬습니다. ‘이런 거 있어요?’하면서 제가 신고 있는 양말의 발목 부분을 길게 잡았다 놨습니다. 탄탄한 튕김이 눈에 보이도록 말이죠. 국산의 질을 찾기 위해 ‘말이 필요 없는’ 최고의 설명이었습니다.
심지어 호스텔에서 같이 근무하는 현지 동료의 도움으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양말 가게도 어렵게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마저도 짱짱한 놈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상점 직원에 의하면 ‘물건을 한국 사람이 만드는 건 맞지만 멕시코에서 제작되기 때문에 질이 다르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결국 여기서 파는 그 올이 듬성듬성한 걸 신고 뛰어야 하나 좌절하고 있을 때, 또 다른 멕시코 동료가 힌트를 줬습니다. 시내에 가면 ‘미니소’가 있다고 말이죠. 미니소가 중국 브랜드긴 하지만 한국 것과 비슷한 게 있지 않겠느냐고 제게 희망을 북돋아줬습니다.
미니소는 한국의 다이소 같은 곳입니다. 온갖 잡동사니를 싼 가격에 파는 가게지요.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대로 찾아왔다고요. 그리고 정말 있었습니다. 제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한국 양말이요. 짙은 파스텔 계열에다 발목 위의 적당한 길이까지. 천의 질감도 완벽했습니다. 한 올 한 올이 아주 탄력 있게 잘 설켜 있었습니다. 표면을 비벼봤을 때 기분 좋은 매끈함이 손끝에 전해졌습니다. 제가 우리나라에서 별생각 없이 신던, 평생 세상 모든 양말이 다 그런 줄 알았던, 바로 그 ‘질’을 그것이 그대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건 미니소 제품이라 정확히 한국 게 아니었습니다. ‘메이드 인 차이나’가 눈에 걸렸습니다.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저는 충분히 만족했습니다. 당장 그걸 신고 공원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여행 짐을 쌀 때 무슨 물건을 제일 고민하시나요? 해외에선 대체품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무리하게 챙겨가는 한국 제품이 있으신가요? 저처럼 장기간 여행을 떠날 계획이시라면 ‘양말의 사재기’도 진지하게 고려해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