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오셨네요!”
11년째 다니는 단골 치과를 1년 만에 방문했다. 재빨리 내가 아는 간호사 선생님들을 찾아 둘러봤지만 다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이왕이면 날 아는 간호사 선생님이 계실 때 치료받고 싶었는데, 다들 쉬는 날인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한 간호사 선생님이 날 아시는 거다. 그분 얼굴을 보며 애써 기억 회로를 돌려봤지만 너무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나는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특히 관심 없는 사람은 더더욱 안 외워진다. 그리고 잊어버리기도 잘한다. 학창 시절부터 반갑게 인사하는 친구를 보면서 ‘아 어디선가 본 것 같긴 한데, 누구더라?’하고 당황했던 경험이 종종 있어왔다. 이웃집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꼬박꼬박 인사하면서도 얼굴 외우는데 몇 개월이나 걸렸다. 대학생 때는 워낙 많은 사람들을 보다 보니 당황스러운 상황들이 더욱 많았다.
같은 과 선배 친구가 식당을 오픈했다고 해서 선배를 따라갔었다. 근데 그 사장님(선배 친구)이 자꾸 친근하게 아는 척을 해서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급기야 사장님은 선배랑 밥을 먹고 있는 우리 테이블에 와 앉더니 나에게 왜 자꾸 자기를 모르는 척하냐고 했다. 혹시 장난치는 거냐고. 순간 나는 사장님의 얼굴을 상세히 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려 가까스로 기억해 냈다. 선배랑 나, 그리고 선배의 친한 친구인 사장님까지 우리 셋은 여러 번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었던 사이였다. 놀랍게도 이런 사건이 사람만 바뀌며 여러 번 더 있었다. 그래서 오해받았던 적도 많았다. 그런데도 당최 나아지지 않는 사람 얼굴 기억력에 나 스스로도 답답했다.
결혼하고 나서는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여러 사람을 만날 일이 없어 괜찮았었는데 올해 겸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나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직장 다닐 때 썼던 방법을 시전 했다. 바로 눈만 마주치면 인사하기.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가니, 누군가 날 쳐다보면 그냥 냅다 인사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1년이 다 되어가니 알아야 할 얼굴은 다 외웠지만 초반엔 얼굴이 너무 안 외워져서 나름 고생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얼마 전 겸이와 아파트 앞에서 걷던 중, 누군가가 “안녕하세요! 어머~ 겸이 엄청 많이 컸네요!”하고 인사를 건네서 나도 아는 척 인사를 했지만 아직도 누군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고새 인사하던 분의 얼굴도 까먹어버렸다.
내가 왜 이렇게 얼굴을 못 외울까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유심히 보지 않아서인 것 같다. 나는 보통 다른 사람의 얼굴을 그저 영혼 없이 바라보는 것 같다. 그래서 엄청난 특징이 있는 사람 혹은 처음부터 내가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거나 관심 있는 경우가 아니면 내 기억에 쉽게 저장되지 않는 것이다.
‘앗 예쁘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사람이 말하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게 된다. 속으로 계속 예쁘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이 바로 내가 그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신호다. 나는 참 편파적인 사람이라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무조건 예쁘다. 그냥 예쁘다고 해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내 눈에 예뻐 보인다. 계속 알았던 사람인데 어느 순간 갑자기 ‘어머 말하는 모습이 너무 예쁘잖아?’하면서 그 사람의 얼굴을 요목조목 자세히 뜯어보게 되는 단계. 이 단계까지 오지 못한 사람들은 전부 잠깐 기억했다가도 금방 까먹게 되는 것 같다.
어느 방송에서 얼굴 기억을 못 하는 것은 그만큼 남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했다. 맞다. 나에게 인류애가 있었다면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세심하게 보고 잘 외웠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타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나는 눈 마주치면 인사하기와 내가 시력이 나쁘다고 동네방네 말하고 다니기, 그리고 능청스럽게 같이 아는 척하기로 버티고 있다. 아무래도 얼굴 기억은 내 영역 밖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