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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 Oct 06. 2021

40살, 또 사춘기

바람이 분다

내가 사는 이곳은 뜨거운 여름날이다. 일 년 내내 나는 그 여름날을 보내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냄새에 나는 온몸으로 아드레날린을 느꼈었고, 그런 시간 속에서 내 안에 새로운 인격체를 만나는 준비를 한 기억이 있다. 특히 겨울에서 여름이 되어갈 때 느끼는 따스한 공기 냄새, 가을에서 겨울에 넘어갈 때  코가 뚫릴 듯한 그 서늘한 공기 냄새가 그러하다. 그 계절 속에서 겨울의 나와 여름의 나는 특히 매우 달랐다.


동지가 되면, 나는 겨울잠에 취해있는 곰이기도 했고, 인적 없는 대나무 숲에서 휭 휭 바람 소리만이 친구일 것 같이 외롭게 지내는 산장 노인처럼 지냈었다. 그렇다고 그 시간에 내 몸이 특별히 아프다거나,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고독을 하루 종일 씹으며 사는 숭고한 시인도 아니었다. 단지 나는 그런 사람으로 지내고 싶었던 것 같았고,  겨울만큼은 그렇게 조용하고, 지루하며, 적당한 무기력하게 즐기며 욕심 없이 지내 주어야 하는 것이 겨울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았다. 창밖의 매서운 찬바람과 눈보라가 그렇게 하라고 내게 전해주는 것 같다고 하면 이유가 적당할지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유월이 되면, 나에게 또 다른 숨은 생명체가 비집고 올라온다. 정숙하게 지냈던, 말끔하게 차려입은 숙녀인 줄 알았던 나는 언제 그러했냐는 듯 가벼운 발걸음과 몸짓으로 사방팔방 돌아다닐 것 같은 여덟 살 여자 아이로 변한다. 발가락이 훤히 드러나는 신발을 신고, 하얗게 감추었던 팔다리도 과감히 드러내며 그동안 숨겨두었던 내 속의 자유와 재주를 마음껏 뽐내고 싶은 마음이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이때에는 난 항상 무언가를 열심히 연마했던 시간들을 보냈었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가장 성취감이 높은 시간도 바로 이때이며, 밤늦게까지 수업을 해도 힘든 기색 없이 잠자리에 들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렇게 나는 계절을 오가며 즐길 줄 아는 좀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살아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정숙하면서도 정열적이었던 내가 지금은 그 계절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에서 멀어져 간다. 마흔 살, 잊고 지내려고 해도 몸이 알고 있다는 그 나이에 들면서, 신기하게도 내 몸과 마음에도 몹쓸 바람이 불어왔으며, 나는 더 이상 겨울도, 여름도 아닌 사람이 되어갔고, 나를 달리고 쉬게 했던 그 어떤 에너지의 원천도 갑자기 까마득해 보이기 시작했다. 바흐의 인벤션 4번만 수없이 반복해서 들으며 어디가 음악의 도입인지, 클라이맥스 인지도 모르겠다는 듯, 씻겨 내려가는 샤워 물줄기처럼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고 허무한 시간을 보내며 마지막 잎새의 소녀처럼 지내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무얼 하는 사람인가

내가 느끼는 공허함, 행복감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묻기 시작했다.

또 사춘기가 왔다.


내 나이 열다섯 살에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재미없는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무엇이길래 순종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여자 친구들과의 우정이란 진지하면서도 깃털처럼 가벼운 관계인 것인지 끝없이 묻고 물었던 시절이 새삼 머릿속에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때도 나는 수많은 질문을 해댔고, 고민했었다. 그러나 결국, 답변을 얻지는 못했다는 기억만 내게 남았다. 질문에 해답을 얻지는 못한 체, 세월이 어린 소녀의 수많은 질문을 삼켜버렸다.  바닷물이 어린 꼬마의 물감 가득 짜 놓은 "팔레트"를 깨끗이 씻겨버리듯 말이다.


그렇게 마흔을 온몸으로 맞이한 나는 고민만으로 가득 찬 한 해를 가득 보내다,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 체 사춘기 바람을 타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했다. 가족 모두 베트남 호찌민에서 잠시나마 살아보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정말 많은 고뇌와 두려움, 설렘으로 밤잠 못 자는 시간을 몇 달간 보내었고, 이것은 내게 "일탈"이었다.  코로나가 온 세계를 뒤흔든 기약 없는 시기에 난 두 아이 손을 덥석 잡고 큰 짐가방 4개를 끌며 베트남에서 시설 격리를 감행하기로 했다.




남편이 먼저 출국을 하였기 때문에, 나는 이제 혼자였고 이때만큼은 진정한 어른이어야 했다.

어른들은 이런 낯선 상황에서도 두려운 표정을 잘 감추고, 익숙한 듯이 일을 잘 처리하지 않은가.

나 혼자 이삿짐을 보내고, 먼지 가득한 빈집에서 버리고 떠날 잡동사니 그릇, 옷, 이불만 웅켜진채 아이들과 지내면서도 나는 어른이 되려고 애를 썼다. 혼자 중고차 시장에 자동차를 팔고, 내 안식처를 부동산에 해결하면서 나는 용맹한 엄마 독수리처럼 잘 해내고 있다고 스스로 격려도 해보았다.


독립, 책임 완수, 인내, 감정 통제.

이것들이 당시 어른으로서 내가 염두해야 할 항목들이었으며, 그렇게 나는 내게 너무 높은 벽과 같은 "어른 도전기"를 겪었다. 그렇게 하나씩 도전을 했고, 지나친 긴장감으로 하나의 도전들이 끝날 때마다,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몸살 기운으로 하루 종일 병원 신세를 져야 하기도 했다. 스케줄러 속의 리스트들이 하나씩 그어질 때마다 내 몸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힘들어졌지만, 그렇게 나는 사춘기 홍역을 치르는 듯했다.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져 41살이 되었고, 지금은 호찌민 도심지에 내 터를 잡고 산지도 일 년이 되었다. 여전히 오늘의 공기 냄새는 매우 덥고, 햇빛이 따가워 콧등에는 항상 땀이 차있다. 길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출근 전 식사를 하고 있다. 쉽게 말해, 노상에서 사람들이 목욕탕 의자와 흡사한 의자에 움츠려 앉아 쌀국수를 먹고 있는데, 그들도 나처럼 땀을 흘린다.


그런데 나처럼 화나 있지는 않다.

더워서 흘러내리는 땀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너 자신을 괴롭히기까지 하냐는 듯 무심하게 땀을 흘려버린다.

문득 15살 때 한여름의 어린 내가 기억 속에 소환되었다. 그 아이는 자기 덩치만 한 가방을 들고, 신발주머니를 한 손으로 돌리며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얼굴은 조금 있으면 곧 터질 듯할 만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흰 피부가 좋을 때도 있지만, 유난히 여름에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 때문에 불편한 기분이 들어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해댔던 그런 여자아이였다.


그날도 볼이 얼마나 벌겋게 달아올랐는지, 길을 지나가던 낯선 아주머니 한분이 "아이고, 너 엄청 덥구나. 얼른 집에 가라. 얼른" 하며 소녀의 발길을 재촉하셨다. 그러나 그때도 소녀의 발걸음은 여전히 가벼웠으며, 새빨갛게 익은 장미꽃처럼 나풀대며 뛰어다녔다. 그 어린 여자아이도  더위로 인한 불편감은 이미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란 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아이 머릿속에는 집에 가서 간식을 먹으며 숙제를 하고, 친구와 놀 생각이 가득했을 테고, 아이는 기분이 나쁠 이유도, 화낼 이유도 없었을 테다.


최근 사춘기 바람이 들면서부터, 나는 가벼운 일에도 수많은 감정에 행동과 말이 동요되고 있다. 온몸으로 자극을 받아들이고, 그 자극을 눈과 입을 통해 내 방식대로 다시 뱉어 내고 있다. 이거야말로 사춘기 여중생이 따로 없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들이 말하는 "꼰대"가 되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향한 미움, 질투, 걱정은 유난히 강하게 나를 흔드는 것 같고, 점점 높아져가는 자존심으로 진짜 꼰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그 속에서도 나에게 오는 성취감, 행복감이란 오로지 나로 인한 선물이 아닌, 내 아이들과 남편으로 인한 성과급 같은 것들이었다.


많은 생각과 관찰의 작업들이 오늘의 많은 시간을 삼켰다. 밤 10시 29분. 몇 번 호흡을 더 고르고 나면 또 다른 1분이 지나겠지. 순간을 열심히 살아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뭔가를 즐겁게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는 않는다. 그중에서도 날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한 것은,  내 엄마 아빠가 날 이 세상에 데려놓고, 내 이름 " 이 지 연"이란 예쁜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이다. 얼마나 가슴 뭉클한 순간을 보내셨을까. 그 많은 이름 중에 그 예쁜 이름을 골라지어 줄 때, 얼마나 벅찬 기쁨을 가지셨을까.


내 이름... 참 좋은 뜻을 지닌 이름이며, 난 다시 내 이름대로 살고 싶다. "알지" "고울 연"

갑자기 한국에 있는 나이 든 내 엄마 아빠에게 너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천진난만하게 웃고 떠드는 우리 아이들에게 민망함과 부끄러운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이런 예쁜 이름을 받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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